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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Aug 21. 2017

청춘과 죽음의 경계에서,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원제 노르웨이의 숲)> 서평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 문학사상, 2010.

  5년 전 <잠>이라는 소설을 통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그의 작품은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 아득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면이 좋았다. 그러나 부동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고 있는 <상실의 시대>는 제목도 표지도 나의 시선을 끌지 못한 탓에 도통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한국에 들어오면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다. 두 제목 모두 작품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나에겐 원제가 더 매력적이다.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내향적이며 염세적인 인물이다. 친구가 없던 그에게 기즈키와, 기즈키의 오랜 연인이었던 나오코는 학창 시절 유일한 친구였다. 그러나 기즈키의 죽음으로 나오코는 오랫동안 마음의 병을 앓다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요양원에 입원하게 되고 와타나베는 그런 그녀를 그리워하며 매주 편지를 한다. 어느 날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미도리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미도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녀와 나오코 사이에서 갈등한다. 


트란 안 훙 감독, 『Norwegian Wood』 . 2010.

  와타나베의 이름에서 토오루는 통하다, 뚫리다, 관철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청춘을 통과하는’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와타나베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과 우울함이 만연했던 시기에도 묵묵히 방황의 시간을 견뎌낸다. ‘와타나베 토오루’는 자신의 청춘을 지키며 성장해나가는 그의 모습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나오코는 연인이었던 기즈키가 자살한 이후로 지독한 마음의 병을 앓고 살아간다. 와타나베는 그런 나오코를 사랑하고 그리워하지만, 같은 수업을 듣는 미도리라는 여자를 알게 된 이후, 그녀에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원제 <노르웨이의 숲>에서 ‘森(숲)’은 나무 ‘목(木)’이라는 상형 문자 세 개를 조합한 것으로, 작품 속 많은 삼각관계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와타나베와 나오코, 미도리도 이러한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다. 미도리는 녹색이라는 의미의 이름만큼이나 생기 넘치고 당돌하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으로 우울에 빠져 병들어가는 나오코와는 대조되는, 생명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미도리도 결국은 가족의 죽음을 품고 있는 여자로, 결국 이들은 모두 평행 선상에 존재하고 있다.


  청춘과 죽음은 너무나도 상반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청춘은 밝고 희망적인 반면에, 죽음은 아득하고 어두운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가 이 작품에서 청춘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이 두 가지의 키워드가 결국은 공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청춘과 죽음의 공통점은 ‘언젠가 끝이 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청춘은 끝이 나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결국 산다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죽음과 가까워지는 일인 것이다. 와타나베의 말을 빌려 삶의 한 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한 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p47
그는 우리들이 이곳에 와 있는건, 그 비뚤어진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비뚤어진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고 했어. 우리들의 문제점 중 하나는, 그 비뚤어진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있다는 거야.
p135
그것은 대체 어떤 인생이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병원의 침대 위에서 절개돼 혼탁해진 머리를 안고,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p286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는다는 것은 얼마나 고약한 아픔일까. 이 작품에는 너무도 많은 죽음이 있다. 

나는 그들의 죽음을 읽어나갈 때마다 내 사람들을 잃는 듯한 절절한 아픔을 느꼈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잃는 것이구나. 와타나베는 기즈키를 잃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상실의 아픔을 받아들였고,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사랑했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드러냈다. 그는 정말로 청춘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그는 나오코를 통해 만나게 된 레이코와 밤새 노래를 부르며 둘만의 방식으로 나오코의 장례식을 치른다. 그 후에 그들은 성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그런 그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들이 어쩌면 그에게 또 다른 생명력을 지니게 하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그는 레이코에 의해 모성적인 구원을 받게 된 것일까.


  이 작품을 오래전에 알았지만 그때 접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지금이기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었다. 이들과 동시대를 산 사람은 아니지만, 하루키의 글을 통해 상실감과 우울함에 젖어 있던 60년대 일본 사회의 무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애절하고 먹먹하고 아름다웠다. 작품 속 이들의 청춘을 진실로 응원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청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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