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는 이유 - 3

벗어나고 싶어요

by 소설

"혜린아, 우리 내일 야구장갈때 미리 만나서 같이가자. 어때?"

"그래, 좋아"

혜린은 수빈의 전화연락이 반가우면서도 혼자 다니는걸 어색해하는 수빈에게 우스운 마음이 들었다.

"근데 지난번에 민호가 너 찾아간 얘기 꺼낸게 뭔가 의미가 있어서 한 거야?"

"웃기지? 몇년이나 지나서, 괜히 할 얘기가 없었나 봐. 내가 불편해 할까봐 그랬나? 흠"

괜한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거인줄 알면서도 재밌는 얘기를 잘 물어봐주는 수빈과의 대화가 마음이 편하다. 혜린은 이제 성숙한 인간이므로 우습고 유치한 마음은 숨기려고 노력하지만 표정에서 뭔가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혜린이 넌 전혀 관심이 안생기는 거야?"

옛날 얘기를 끄집어서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한몸에 관심을 받는 기분이 꽤 유쾌했지만 유난떨 것 없다는 듯이 짐짓 모른척한다.

"남친이 있기도 하고, 저렇게 용기도 없고 마음도 없어 보이는데 난들 어째. 별루."

잠깐 말랑말랑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지만 혜린에게는 항상 적절한 이유가 있었고

주변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어서,

누구와도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었다.

아쉬울건 없었다.

"옛날이야기라 쳐도 굳이 꺼내는 거 보면 마음은 엄청 느껴지던데, 안그래?"

"아무 연락도 없다가 굳이? 그냥 이야기 거리가 없어서 괜히 그런거야. 왜 수빈이 너가 관심있어? 난 상관없어."

"뭐래니?"


괜스레 학교 다닐때 남자 선배들이 한 여자선배를 '껌'이라고 부르던 일이 생각났다.

공대라 몇 없는 여자선배 중에 조용하고 순한 공주같은 미모의 천상 여자여자한 캐릭터여서 남자선배들이 모두 그 언니를 챙기는 모습이 역력했는데, 언니가 없는 곳에서는 비밀스럽게 껌이라고 칭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아서 뭔가 싶었는데,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를 보고 '다른 사람이 씹던 껌을 내가 씹으란 말이냐'를 줄여 부르는 말이란 사실을 알고, 멀쩡해 보였던 남자 선배들이 다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도도한 그 언니가 못마땅하더라도 무리지어서 비하하는 그런 표현은 불쌍하다 못해 좀 병신같지 않은가,

나약한 초등이 그랬다고 하더라도 가정교육 운운했을텐데 20대의 남성들이 우루루 모여서 본인의 마음이 거부당했다고 자존심이 상한 그 상처를 위로하기 위해 혹은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그 대상을 더러운 무엇으로 치부해버리고 나서 만족하였을까.

감당못할 그 신포도,

나에게는 닿지 못할 그녀,

그 선배들의 비밀스럽게 웃는 표정이 떠오르자 역겨워졌다.

혜린은 그냥 남자 사람들이 에둘러 자신을 좋아한다고 표현하거나 낌새가 느껴지더라도 모르는 척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일부러 허당처럼 순진한 듯 대처하는게 쉬웠다. 일일이 설명할 감정이라는 게 없었다.

저런 마음은 늘 변하는 거라는 걸 알았다. 감정은 도무지 믿을 만한게 아니었다.


엄마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집에 손님이 오거나 아빠가 없는 날이면 엄마는 현관입구 진열장에서 천천히 술을 고르고 계셨다.

"비가 오니까 오늘은 레몬향이 좀 나는 리몬첼로를 마셔야겠다. 기분이 상큼해지게. 저녁에 영화하나 볼까하는데 같이 볼래?"

"뭐 볼건데?"

"몰라, 좀 익자릭(exotic)한 영화를 보고 싶은데, 폴 세잔과 에밀졸라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있던데 그거볼까? 너 보고 싶은거 뭐 있어?"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젊은 시절을 보낸 엄마는 유럽영화를 좋아한다.

유럽이야기만 나오면 기분이 좋아보인다.

"난 별로"

적당히 자유롭고 고상한 엄마는 사실 엄마가 혼자 보고 싶은 영화가 정해져있다.

내가 보고싶은 영화를 이야기하면 그날 엄마는 영화를 2편 본다. 내가 보고싶어하는 영화를 같이보고 한밤중에 우리들이 잠든 사이 엄마가 원하는 영화를 혼자 본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를 항상 우선으로 두는 엄마의 지겨운 레파토리는 늘 같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러니?"

공부하는 도중에 아빠와 결혼해서 유학생활하며 힘들게 나를 키웠는데, 엄마의 높은 기준을 채워주기에 나는 역부족이었다.

엄마에게 적정한 기준이 있는지도 사실 의문이다. 어디에나 엄친딸은 존재했으니까.

그렇게 힘들게 키우라고 내가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억울했다.

독일에 대한 향수로 그랬는지 엄마는 한국의 현실에서 만족하지 못했고 나에게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그러다가 훌쩍 어디론가 떠나서 며칠이 지나면 아무일 없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오곤했다.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현실을 벗어나 도망치는 내 습관은 엄마를 따라 생긴건지도 몰랐다.

지난번 남친이 너무 힘들다고 헤어지자고 했을때 나는 도무지 이유를 알수가 없고 구질구질한 기분이 들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파리로 가는 티켓을 샀다. 잠시 벗어나면 어찌 마음이 해결될 것 같았다.

디자인 회사에서 받는 월급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여행 경비와 용돈으로 쓰는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엄마가 출장이라고 좀 말해줘. 면세에서 뭐 사다줘? 엄마?"

"아빠가 알면 큰일나려고 그래. 회사에는 얘기가 된거야?"

"로얄 살루트 어때?"

"얘가 누굴 닮아 이럴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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