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4세와 영화 <여왕 마고>
일요일에는 모든 국민들이 닭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겠다
오늘날 프랑스의 상징인 닭.
구교(가톨릭)와 신교(위그노)의 종교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프랑스를 안정시키고 부르봉 왕조를 연 앙리 4세는 '쉴리'공을 재무장관으로 기용하여 국가 경제 재건에 나서면서 프랑스 국민들이 일요일마다 닭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귀족들의 특권을 줄이고 농민과 상공업자의 성장을 촉진했던 경제 정책은 프랑스를 풍요롭게 만들었고 앙리 4세는 프랑스의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 위그노: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
영화 <여왕 마고>는 1572년 '앙리 드 나바르(후에 앙리 4세가 됨)'와 '마고(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결혼식으로 시작된다.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황폐해진 프랑스의 평화를 위해 신교도인 나바르의 왕 '앙리'와 구교도인 '샤를 9세'의 동생 '마고'가 정략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결혼식은 세기의 대학살을 불러온다.
* 나바르: 남프랑스의 작은 왕국으로, 오늘날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걸쳐있는 바스크 지역
바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1572).
당시, 왕이자 마고의 오빠인 샤를 9세는 신교도인 콜리니 제독을 아버지처럼 따랐고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구교도)는 콜리니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 신교도들의 반발을 없애기 위해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신교도들을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학살하기 시작한다. 파리에서만 수천 명, 전국적으로는 수만 명의 신교도들이 희생되었다.
바로 그 날, 파리의 거리에서 하룻밤 만났던 '라 몰'이 부상당한 채 궁으로 피신을 오고 마고는 부상당한 '라 몰'을 구해주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짐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 로렌초 2세의 딸로 앙리 2세의 비이자 마고의 어머니.
아들 셋을 모두 왕으로 만들었으며 섭정을 하였다(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남편인 앙리 2세가 죽은 후에도 그를 애도하면서 평생 검은 옷만 입었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검은
드레스만 입고 나온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와 세련된 식탁 문화를 프랑스에 알린 장본인
파리의 신교도들은 대부분 죽었지만 새신랑 앙리 드 나바르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살아남았다. 프랑스 왕궁은 그가 한 개종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3년 반 동안 그를 가두었지만 앙리는 신교도들의 도움으로 탈출, 다시 신교로 개종한다. 하지만 샤를 9세의 뒤를 이은 앙리 3세마저 후사 없이 죽자 가장 가까운 혈족인 그에게 왕관이 돌아온다. 그러나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신교도 왕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앙리는 다시 한번 승부수를 뛰운다.
“왕은 종교를 바굴만큼의 가치가 있다”며 또다시 가톨릭으로 개종하며 파리에 입성해 왕위를 잇는다.
영화는 알렉산드르 뒤마의 소설 <왕비 마고>를 원작으로 하며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중심으로 앙리 드 나바르(나바르 왕국의 왕)가 앙리 4세(프랑스 왕)가 되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실제 앙리와 마고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결혼 27년 만에 이혼한다. 그리고 둘 다 바람둥이로 알려져 있다.
앙리 드 나바르는 왕관(앙리 4세)을 위해 세 차례나 종교를 바꾸었지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 칙령'(1598)을 선포하여 핍박받던 위그노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세월이 흘러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무효화할 때까지 앙리 4세의 치세는 프랑스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었고 풍요로운 시대를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