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아이를 재운 후 하루 동안 아이를 안으며 흘리고 말리고를 반복했던 땀을 시원히 씻고 나왔다.
머리를 탈탈 털다가 불현듯 ‘아까 남편과 함께 포옹하며 뽀뽀하는 모습을 다온이는 어떻게 봤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내 딸 다온이는 우리의 애정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남편은 땀으로 절여진 파김치가 아니라, 파김치에서 다시 살아나 밭으로 돌아가려는 싱싱한 파가 된다. 아이를 보면 하루 종일 회사일로 피로했을 육체와 정신이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남편은 격양된 목소리로 신이 난 아이처럼 딸에게 말을 건다.
“다온아~! 엄마아빠 뽀뽀한다~! 이것 봐라~! 쪽쪽쪽”
우리는 뽀뽀를 하며 보란듯이 꽉 껴안는다.
이제 '100일'을 갓 넘은 아이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씽긋 웃다가 신기한 듯 바라본다.
자기를 안아주고 우유를 주는 존재들이 서로 붙어있구나 생각하겠지?
아니면 큰 거인들이 붙어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이가 좀 더 커서 '유치원생'이 되면, “힝~~ 나도 안아줘” 하며 우리 둘 사이를 질투하듯 파고들 것이다, 그러고는 엄마아빠의 냄새와 체온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겠지.
아이가 좀 더 커서 '청소년기'가 되면 우리를 낯부끄럽게 바라볼지 모른다. ‘남사스럽게 다 큰 어른이 자식 앞에서 뭐 하는 거야’ 하고 생각하며 다 큰 어른인양 픽 웃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릴지 모른다. 부모가 나누는 뽀뽀의 깊은 의미까지는 읽지 못하고 육체적인 민망한 사랑으로만 생각하면서.
아이가 좀 더 커 '성인'이 되면 우리의 애정표현이 힘든 날에 받는 ‘따스한 선물’이 될 수 있다. 아이도 원시림 같은 사회에서 사느라 힘들었을 마음에 따스히 쉬어갈 수 있는 보금자리를 선물 받은 느낌을 받겠지.
서로 사랑하는 부모가 곁에 있다는 것은 어떠한 물질적인 풍요보다 내면을 행복하게 한다.
마음이 풍요로워지니 자신감이 붙어 당당해진다. 가족 간에 불화가 있는 재력가가 부럽지 않다. 당당하니 아낌없이 사랑을 주게 되고, 사랑을 주게 되니 부메랑처럼 다시 사랑을 받으며 밝고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해 간다.
또한 부모가 포옹하며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 속에서 자식은 서로의 부족함까지도 끌어안는 넓고 깊은 사랑, ‘포용’을 배우게 된다.
아이들도 안다. 부모의 부족한 점을.
어릴 때는 순수한 눈으로 부모를 보았다면 자라면서 한층 성숙한 눈으로 부모를 투명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부모도 인간이라는 것을.
꼬맹이 때 우러러봤던 대단한 어른이 아니라, 서로 부족한 사람끼리 만나 아옹다옹하며 핥고 쓰다듬으며 사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애정표현하며 사는 부모가 더 이상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닌, 떳떳하게 자랑하고 싶은 자신의 워너비가 된다. 자기 눈에 부족한 사람을 끝까지 끌어안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랬다. 지지고 볶으며 서로 헐뜯고 싸우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보았고 가슴에 생채기도 났지만, 결국에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끌어안아 쓰다듬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사랑의 강인함’도 보았다.
난 내 딸 다온이가 함께하는 사람을 깊이 있게 사랑하면서 자신도 함께 커 나가는 성숙하고 따뜻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아플 때도 있지만 진짜 사랑을 할 줄 사람으로.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내일도, 바다의 파도 같은 일상 속에서 다시 힘을 내어 남편을 힘껏 끌어안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