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프리즈, 키아프 관람기

관람 후기

by GIL

9월이 되면 프리즈와 키아프 볼 생각에 맘이 설레이는 나.


아침부터 밤까지 풀코스로 둘러보려고 티켓을 구한 후 급하게 연차를 냈다.

전날 밤까지 너무 괴롭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는데 막상 휴가를 낸 날 아침이 되자, 마음이 상쾌해졌다. 먼 곳으로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아이들을 재촉할 일도 없는 걸.ㅎㅎㅎ


전날 퇴근 후 마감 30분 전에 도착해서 딱 30분 먼저 보고 갔다. 잠시였지만 재미있는 그림을 보는 건 언제나 맘이 두근거리는 일


프라이빗 컬렉션

당일 새벽에 깨서 예약한 프라이빗 컬렉션 프로그램을 가기 위해 준비하다 보니 늦어서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갔는데 나 혼자였다… 엄청나게 뻘쭘한 상태로 앉아있다가 컬렉터 분이 하나 둘 모아놓은 그림을 둘러보았다. 거의 한국 근현대 미술 집대성 수준으로 박서보, 김구림, 김창열, 하종현, 윤형근, 김종학, 이우환, 이배, 그리고 정상화까지 그 시절을 대표하던 분들의 작품이 한데 모여있었다. 이게 한 사람이 모은 작품들이라니 놀랍기만 했다. 늦게 오신 분 까지 포함해서 3명이 컬렉터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파는 엄마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연스레 그림을 하나 둘 모으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고, 특히 셀프 퇴사 선물로 그림을 산 후부터 본격 컬렉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직후에 시작된 미술시장 호황으로 인해 갤러리 전시를 시작했고, 본인이 가진 작품들만으로 벌써 6번째 전시를 개최하는 중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덕업일치가 아닌가 싶다.

예술이 먼저인지, 삶이 먼저였는지, 인과관계를 떠나, 작가들의 작품은 삶 그 자체였다. 평생의 고민과 철학이 그림에 응집하여 표현된, 그들의 고뇌가 함축되어 있는 그림이 곧 그들의 삶인 것이다. 컬렉터분은 계속 돈이 많은 건 아니라고 하지만, 이 정도 컬렉션을 가지려면 기본 베이스가 남달랐을 것 같다. 그리고 나 또한 컬렉터가 되기 위한 마음가짐? 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과연...)

사람이 별로 없어서 정말 프라이빗한 공간까지 볼 수 있었다. 좀 심각하게 멋진 공간에 그림들을 보니, 공간에 그림을 놓은 게 아니라 그림을 위해 공간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의 주인은 그림일지니.


프라이빗 컬렉션을 감사한 마음으로 감상한 후, 코엑스로 향했다. 프리즈를 보기 위해서. 오랜만에 이전 회사를 지나가는 버스를 타니, 새삼 이 동네가 좋았다 싶다. 원래 기억은 미화되는 법이라잖아요.


프리즈

점심을 먹고 지인과 같이 전시를 보았다. 마침 컬렉터 분께서 설명해 주신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잔뜩이어서, 나는 또 들은대로 신나게 얘기해 주었다. 이분의 그림은 끝을 태워서 어쩌고, 이분은 70년대와 80년대의 작품이 어떻게 다르고 어쩌고 저쩌고~ 설명하는데 언니가 좋아해 주어 나 또한 즐거운 맘으로 재잘거린 것 같다. 또 런던 베이글 뮤지엄도 줄이 별로 없기에 하나 사 먹고, 쉬지않고 쏘다니며 그림을 보았다. 궁금했던 가격도 물어보고 그림 설명도 들었다. 개인전 형식으로 나온 갤러리들도 많았는데 노은님 작가님과, 이청청 작가님의 작품들은 동양적이면서 힘 있는 선, 색감 때문에 유독 맘이 끌렸던 것 같다. 나도 저렇게 거침없는 선을 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밖에도 유수의 작가들의 작품들이 수두룩 빽빽. 같이 간 언니는 살보의 그림에 하트가 뿅뿅했다. 역시 좋은 그림이 좋다. 너무 재미있어서 둘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돌아다녔다.


키아프

프리즈를 먼저 보고 키아프에 갔다. 프리즈에서 한껏 높아진 눈으로 키아프를 가면 조금 아쉬운 면이 없지 않지만, 또 보다 보니 키아프 나름대로 좋았다. 이번에는 친구가 한번 봐 달라고 한 작가의 작업 이야기도 듣고 그림도 유심히 보았다. 기억 시리즈가 아스라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작업 노트는 조금 종교적인 색채가 짙었으며.

라운지에서 술과 물을 마시며 좀 쉬어갔다. 이제 각자의 길을 갈 시간. 나는 삼청동으로 간다.


삼청나잇

삼청동 가는 길은 멀고, 내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하지만 휴가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기꺼이 삼청동으로 갔다. 삼청나잇은 갤러리들이 밤늦게까지 하고 여기저기서 케이터링도 있어서 삼청동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그런 축제 분위기에 휩쓸려 우리도 맥주를 마시고 와인을 마시고 와인을 마시고… 그런 밤을 보냈다. 오전까지 비가 와서인지 날이 무척 맑았고 밤바람은 약간 선선해진 느낌이었다. MMCA 마켓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 갤러리 현대로 가서 김민정 전시를 보았다. 종이를 태우고 손으로 끄는 무한한 작업에 경이를 표하며, 와인을 또 한잔하고 학고재에 갔다. 흙으로부터 시작된 것들을 모아둔 매우 한국적인 전시였다. 도예와 함께 걸린 작품들이 정적이면서도 힘 있게 다가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 줄을 서서 보았다. 그리고 국제갤러리, 경복궁 쪽으로 카페 문이 활짝 열린 채 사람들은 활기를 띠고 앉아서 술을 마시며 시끄럽게 떠든다. 어딜 가나 줄이 길게 늘어서있고 디제잉을 들으며 와인을 마셨다. 루이스 부르주아 전시는 손, 시계, 신체가 차례로 빙 둘러 전시되어 있어 시간의 흐름에 따른 한 사람의 인생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기까지 보고 국현을 가려고 했는데 문을 닫아서 아쉬운대로 2차를 하러 간 곳이 또 대기가 길어서 아트선재로 갔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미드나잇콜라다를 받았다. 깊은 밤, 아이스크림과 미드나잇콜라다를 마시며 우리는 짠을 하고 모기를 잡았다. 그리고 걸었다. 풀숲, 돌다리, 오래된 길을 걸어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가을의 문턱에서, 정신과 미음이 함께 충만했던 하루

-술마시고 쓴 관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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