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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Nov 23. 2022

또 하나의 직업, 서평 쓰는 사람


메일 한 통을 받는다.

"서평단 모집에 당첨되셨습니다. 00월 00일까지 서평을 작성해 주시고 개인 SNS에 올려주세요~"


아주 기분 좋은 메일이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열심히 출판사 서평단 모집에 문을 두드렸다. 정말 읽고 싶은 제목의 책을, 너무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그 누구보다 빨리 읽는 기쁨을 갖고 싶어서였다. 아직 소개되지 않은 영화를 편집하는 사람이나 브랜드 신상을 들여놓는 백화점 MD의 마음이 나랑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도 모르는 세계에 먼저 발을 담가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서평단의 매력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이 마음이 전부였다.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고, 서점 매대에 잠시 있을 시간도 없이 활자로 인쇄되어 바로 우리 집에 온 귀한 책. 택배문자를 받은 순간부터 현관문에 이르기까지 회사에서 내 마음은 그저 퇴근 생각뿐이다.


어떤 책일까. 재밌을까? 아님 재미없을까?


빨리 퇴근을 하고 후다닥 택배박스를 뜯어 새 책의 냄새를 맡는다. 지금 계절에서만 느끼는 차가운 공기를 가득 머금은 종이 냄새를. 먼저 책 표지를 훑어보고 이리저리 만져본 다음 서재 책상에 가져다 놓는다. 씻고 밥 먹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난 뒤에야 우리는 좀 더 정성스러운 눈 맞춤을 할 수 있다.


서재 방문을 꼭 닫고 유튜브로 잔잔한 음악을 찾아 틀어 놓으면 이제 서평의 세계에 접속할 시간이다. 출판사에서 미리 짤막하게 보내준 책 소개를 천천히 읽고 어떤 책일지 상상해 본다. 마치 소개팅에서 간단한 자기소개 후 상대방을 가늠해 보는 것처럼.


이런 짧은 의식 후 목차를 읽어보고 찬찬히 책장을 넘기면 첫 장에 ‘작가의 말’이 나온다. 작가가 어딘가에 존재할 독자들에게 전할 말을 고심하면서 썼을 그 언어들을 나는 정성스럽게 읽는다. 사실 어떤 책은 그 책 내용보다도 작가의 말이 가장 좋을 때가 있다.


뭔가 아이러니한 것 같지만 작가정신 출판사에 나온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은 박완서 작가님의 소설과 산문, 동화의 서문과 발문에 실린 '작가의 말' 67편을 망라하여 연대순으로 정리한 책으로(네이버 책 소개 참조) 그만큼 한 권의 책에서 작가의 말은 꽤 중요한 지분을 차지함을 의미하고 이 부분을 읽지 않는 일은 책의 전부를 보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서평을 쓸 때 중요한 건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종종 글의 맥락을 따라갈 새 없이 어디에선가 길을 잃곤 하지만 어쨌든 작가가 영혼을 갈아 넣어 쓴 이 글을 함부로 다루지 말자고 다짐한다. 가능한 천천히 그리고 몇 번씩 곱씹으며 문장을 여러 번 읽을 때가 있고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에서 내가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다른 이가 먼저 적어 놓은 서평을 참고하기도 한다. 사실 모든 책이 술술 읽히는 건 아니어서 정말 내가 알지 못하는 모호한 세계에 발을 담그면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니면 작가가 출판 시기에 맞춰 한 인터뷰에서 키워드 문장을 찾기도 하는데 어쨌든 서평을 쓰는 목적은 독자가 이 책을 매력적으로 느끼게끔 만드는 것이므로 내가 읽은 소감과 감동을 솔직하게 적는 게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서평 잘 쓰는 방법 따위를 적으려는 건 아니다. 그저 나의 두 번째 직업으로서 만족하는 이 세계를 소개하고 싶어서 브런치를 열었다.


읽는 일과 쓰는 일은 너무도 다른 세계여서 사실 마음이 많이 기우는 쪽은 의심 없이 읽는 쪽이다. 머리와 가슴만 있으면 얼마든지 눈으로 읽고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감동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 편견 없이 글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읽는 세계에 비해 이 쓰는 세계는 내가 길을 파고 내야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괴롭다. 뭐 물론 그 글을 쓴 작가만큼 괴로웠겠느냐만은 어쨌든 하얀 백지에 그 책에 관한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일은 서평 쓰는 사람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 쓰는 순간에 몰입하기 시작하면 내 주변 공간은 차분한 분위기로 둘러싸인다. 늘 뭔가를 bgm처럼 틀어놓지만 어느덧 ‘촤락’ 책을 넘기는 소리와 ‘톡톡’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남고 그러다 한 발자국 더 깊게 들어가면 책의 내용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때가 온다. 이 몰입의 순간은 나의 두 번째 직업에서, 그리고 나의 조용한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세계이며 하루 종일 현실 속을 부유하며 떠돌았던 마음이 비로소 쉬는 공간을 찾은 느낌이다.




채널예스 <노시내 작가의 피정>

번역은 내가 안심하고 들어설 수 있는 한결같은 공간을 제공한다. 익숙해서 편안 안식처이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피난처이다. 문밖에서와는 달리 익숙한 언어를 포기할 것을 강요당하지 않는 아니 오히려 더 정제시켜 조심스레 안고 갈 수 있는 안심 공간이다.



병원 마케팅 일을 하면 가장 많이 다루는 게 바로 ‘언어’다. 요즘은 유튜브, 숏츠와 같이 영상시대라고 하지만 여전히 글로 설명하고 먹히는 콘텐츠가 있다. 블로그와 포스트, 카페, 지식인도 그중에 하나고 여기에 담는 글은 내가 매일 6시간 이상 읽고 생각하는 것들로 디스크, 관절, 부정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했던 말을 또 하고, 그 세계에 오래 머무르면서 그동안 써왔던 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생각들이 결국 내가 되었다.

결코 그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평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 세계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늘 하던 생각과 글에서 새롭고 우아한, 때로는 날것의 말들과 마주치며 내 생활에 다양성을 얹었고 잘 쓰지 못하는 글을 꾸역꾸역 써냄으로써 작은 통제력도 길렀다. 거기다가 같은 책을 읽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내보내는 온라인의 동료들도 생겼으며 책을 출판하고 홍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출판사 마케터들의 노고에도 아낌없이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의 직업-병원 마케터를 조금이나마 다정하게 대할 수 있게 된 건 생각지도 못하게 얻은 보너스다.


안심 공간. 내가 뭘적고 어떤 생각을 하든지 간에 하나의 목표에 여러 방법으로 도달하게끔 격려해주는 서평의 세계가 있었다. 이곳은 세상 트렌드를 놓치지 않도록 했고 어쨌든 출판사 직원과 일로 만난 사이기 때문에 비즈니스적인 면모도 갖추는 어엿한 직업인으로 설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책에 대한 논리와 감상을 균형 있게 말할 수 있도록 했다. 월급만큼 돈은 못 벌었지만 월급에 준하는 삶의 만족감과 정신적 풍요로움을 주었으니 두 번째 직업-서평가는 내게 매우 소중하다.


지금은 출판사와 별개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기기도 한다. 스스로 마감을 정해 내 콘텐츠를 더 많이 남겨 놓는 일이다. 비옥한 땅에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책 종류를 가리지 않고 동화책, 실용서, 만화책 등등 어떤 책이든 세상에 필요한 독자에게 가 닿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쓰고 또 쓴다.


책이 가진 운명은 독자를 만남으로써 발휘된다고 여겨왔다. 다양한 독자들과 만나는 운명일 수도 있고, 반대로 책이 사라지는 운명일 수도 있다. 어쨌든 서평가는 그 책의 운명이 좀 더 길고 럭키할 수 있도록 독자들에게 징검다리를 놓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읽고, 쓸 뿐이다.

나도 누군가의 서평 덕분에 그 책과 운명처럼 만난 걸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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