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듣는 ‘문해력의 상실‘이란 말이 귀에 오래 남았다. 어떤 학생은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에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고, 하루와 이틀 다음에 왜 사흘이냐고 따져 묻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배웠던 이 글이 지금의 학생들에겐 너무도 먼 조상의 언어 같은 걸까? 아니면 우리의 언어가 지금 시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꼰대처럼 옛날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까. 이유야 어쨌든 한 국가에서 한국어를 쓰는데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는 만큼 잃어버린 문해력을 다시 찾아올 방법은 없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문해력 상실을 가장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곳, 바로 회사다. 나는 이걸 묻는데 쟤는 저 대답을 한다. “하아, 그 말이 아니라요.” 다시 이걸 물으면 여전히 저걸 대답하는 사람과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함께 일해야 하는 숙명을 가진 자. 그래서 <기획서 잘 쓰는 법>, <한 번에 끝내는 설득의 기획서> 같은 책들이 잘 팔리나 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 동문서답을 해대며 일을 하고 있으니 이쯤 되면 네 머리에 똥이 있거나 내 머리에 똥이 있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
이곳에 글을 쓴 지도 몇 년이 되었다. 하지만 유명한 작가는 되지 못했고 조회수는 하루 10이 안 된다. 물론 매일 글을 쓰고 올리는 열정이 없는 작가에게 조회수 잿팟을 바라는 건 무리지만 어쩐지 글을 쓰기 전 힘이 빠지는 건 사실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을 쓰고 앉아 있는 건 웬만큼 의지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이유를 대보라고 하면 ‘앞으로 더 잘 살고 싶어서’라는 말밖에 없다. 현재보다 나은 삶을 꿈꿔서, 그런 인생에 도달하기 위해 세상에 대한 글을 쓰고 나만의 서사를 내보이고 있는 중이다.
이런 생각이 요즘 더 조급하게 드는 이유는 쳇 gpt, 생성형 AI가 더더더 많이, 그리고 깊게 발전하고 있고 사실 ‘발전’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완성형에 가까운 시대가 코 앞에 와 있는 걸 느끼고 있어서다. 회사에서도 쳇 gpt를 통해 기사를 작성하고 포스팅도 한다. 나보다 뛰어난 데이터 수집 능력으로 내가 질문만 잘 던지면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보다 더한 고급 정보를 술술술 말해주는 똑똑한 비서가 24시간 잠도 안 자고 옆에 있다.
문제는 그 쳇 gpt가 지금은 비서로 내 일을 보조하는 수준이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는 이 아이가 주는 정보를 가지고 내가 무엇을 만드느냐가 중요해질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즉,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어떤 서사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 것인가가 내 능력이 된다는 말인데 그러려면 지금보다 언어를 더욱 섬세하고 가치 있게 다룰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훈련되려면 ‘나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말과 글, 즉 우리가 구사하는 언어가 곧 우리 인생의 수준을 결정한다. 같은 상품을 팔아도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면 다른 가치를 부여할 수 있고, 같은 에피소드를 말해도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면 ‘나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언어와 싸우는 자는 결코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 언어와 공존하며 서로를 이해하라
상대의 분노를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고, 세상의 흐름을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스치는 세상의 뒷덜미를 잡아채 원하는 곳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
<문해력 공부>
책과 글을 가까이하는 직업과 취향을 가졌지만 언어와 공존하며 사는 일은 생소하다. 돈을 받고 글을 쓰는 직업으로서의 작가도 아니고, 타국의 말을 한국어로 바꾸는 번역가도 아니며 세상의 이야기를 지면에 옮기는 기자도 아니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구절과 감상을 적는 서평가 정도의 일을 하며 회사 운영진 입맛에 맞는 안내문을 작성하는 직장인 정도인 나에게 언어와 공존하며 산다는 건 매우 모호하고 흐릿한 일 같다.
나의 글은 언제든 결재를 목적으로 이성적인 설득을 위한 도구이자, 밤에는 한없이 감상에 젖는 촉촉한 일기 같은 거였다. 그래서 늘 ‘나만의 언어’를 꿈꾸면서도 다른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수준이고 다른 사람들이 지어낸 세계와 사람들을 열망하는 양가의 감정에 빠지기를 반복할 뿐, 더 깊고 촘촘한 그물망에 건져 올린 나의 언어라는 건 없었다.
<문해력 공부> 책에 의하면 ‘언어를 공존하며 생각하는 사람은 문제를 바라보는 자기 생각이 분명해서 명확한 근거로 상황을 바라본다’고 한다. 여기서 명확한 근거라고 함은 목적이 있는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언어가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문제를 말 그대로 ‘보기’만 하는 사람은 대책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전달하고 표현할 줄 아는 상황이 자주 만들어지면 아무 상관없이 보이던 것들이 연결되면서 그 속에서 통찰력이라는 능력이 길러지고 결국 언어를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워지는 것이다. 지혜는 모든 문제를 여유롭게 해결하는 중요한 키이자 반드시 인생의 목적에 닿게 하는 슬기로운 지식이기에 아무리 쳇 gpt와 생성형 AI가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시대를 지배한다 해도 결국 인간의 위대한 ‘지혜’는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잘 살기 위한 언어와의 공존은 나를 드러내는 수단이자 궁극적으로 미래의 내 생존키워드가 될 것이다.
좋은 사람과 재밌는 티키타카를 이루기 위해 긍정의 말을 모으고, 해내고자 하는 일을 잘 빌드업하기 위해 설득의 언어를 쓰고, 좋고 싫고를 어른답게 전달하려 정중의 말을 배우고 성숙하고 도덕적인 일상을 보내기 위해 쉽고 간결한 대화를 할 줄 안다면 미래의 나는 조금 더 잘 살고 있지 않을까?
작은 꽃과 풀들로 풍성한 정원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은 같은 경험을 하고서도 자신만의 서사로 톤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고, 앞으로의 계획을 선명한 확언으로 내뱉는 게 어색하지 않을 테지. 결국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비록 조회수가 6일뿐인 이곳에 나의 서사를 완성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