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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24. 2021

어쩌다, 달리기

달려라, 산책


어쩌다라는 부사의 사전적 의미는 ‘어쩌다가’, 유의어로는 ‘때때로, 뜻밖에’ 가 있다. 어쩌다 달리기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요즘도 가끔 사람들은 묻는다.


아직 뛰고 있어? 와, 대단해. 어떻게 뛰게 됐어요? 원래 뛰었어요?


질문이 들어오면 바로 답하지 못하는 편이기도 하고(생각이 많다) 어쩌다 뛰게 되었는지 언젠가 한번은 나 스스로에게 물어야지 하고 있었던 터라 이런 질문을 받고 나서 한참을 골똘했다. 어쩌다 달리게 되었을까.

오늘까지 다섯 달 째 달리고 있다. 8월부터는 퐁당퐁당 달리고 있지만 그래도 한 달에 스무 번 이상은 달리고 있고, 여행을 간 때에도 달리기용 운동화를 따로 챙겨 가서 근처에 뛸 만한 곳을 물색했다.

달리기 기록장과도 같은 나이키 러닝 앱을 확인해 보니 지금까지 총 550.3 킬로미터를 달렸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대략 400 킬로미터 정도, 서울에서 해남도 비슷하니까 서울에서 남쪽 끝에 갔다가 다시 중부 내륙의 한 도시를 찍으면 될 정도의 거리가 된다. 포항에서 7번 국도를 따라 강원도 고성 까지 달리고도 다시 서울에 갈 수 있다. 오, 이렇게 쓰고 나니 꽤 대단한 거리다. 티끌모아 태산, 마일리지 모아서 제주도도 왕복할 수 있겠어. 그러고보니 바다코끼리 월리가 북극에서 스페인까지 빙하 타고 500 킬로미터를 떠내려왔다는데, 더 모으면 스페인도 갈 수 있겠다.

그러니까, 대체 왜 뛰게 되었을까.

지금부터 십여년 전 쯤, 다이어리 앞 장에 새해 계획을 적을 때면 나는 줄곧 책 100권 읽기와 함께 달리기 10 킬로미터 뛰기를 빼먹지 않았다. 그것은 2009년 몰스킨에도, 2010년에도 적었던 바람이었다. 그런 마음을 오래 품고 있다 보니 작은 바람이 모여 토네이도 급이 된 것일까, 2021년 5월 31일에 두 해 전에 사 둔 러닝화를 꿰 차고 별다른 마음의 동요 없이 양재천을 뛰었다. 그냥 한 번, 어디 뛰어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나선 길이었다. 다리가 당겼고 숨이 찼고 쉬다 걷다는 반복해서 겨우 겨우 2킬로미터가 못 되게 뛰고 집에는 걸어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이고 삭신이야, 아이고 내 대퇴사근육이야, 하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5월 30일 까지 운동이라고는 숨 안 차는 움직임들이 주를 이뤘던 생활이었다. 동네 친구들이 너도 나도 추천해서 다닌 요가원 마저도 온 몸의 근육을 써야 해서 끙끙 거리다 쉬고 있던 참이었다. 걷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불혹이었다.

첫 달리기를 마치고 다음날은 마지못해 나갔다. 사람이 가오가 있지, 그런 비장함은 아니었다. 운동으로 긴장한 근육을 풀기 위해서는 같은 운동을 계속해야 한다고 들어서, 당기는 허벅지를 풀어주고자 달려보았다. 그러고는 나를 아는 거의 모든 이에게 말했다. 나 오늘부터 달리기 시작했어!


첫 달리기는 사실 잠깐의 이벤트, 할로윈 시즌 음료 같은 반짝 프로모션이었다고나 할까. 반복되는 일상 속 소소한 이벤트처럼, 몇 번 하다 말 것 같은 일종의 일탈이었다. 그러니까, 어쩌다 한번 달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때가 그랬다. 나도 친구들도 모두 전례 없는 팬데믹에 지쳤고, 누군가 변화를 꾀하는 모습은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만나지 못해도, 아니 만나지 못해서 더욱 퍼포먼스는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인스타그램에 한 번 올렸을 뿐인데, 다들 응원과 감탄과 놀라움을 보냈다. 얼마나 뛰었어? 어디까지 뛰었어? 신호등 기다리면서도 뛰고 있지? 등등. 그들은 장마를 걱정하는 내게 비가 오는 날 뛰는 우중런이 얼마나 멋진지 말해주었고, 달리던 길 위 에서 만나면 하이파이브를 해주었고, 내쉬는 호흡에 발 박자를 맞추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매일 내가 올리는 달리기 일기를 기다려주었다. 11인치 아이폰 화면 속에 친구들과 삶, 온기와 위로, 격려와 응원이 있었다. 어쩌다 한번 달리기를 했을 뿐인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기를 하길래 나도 한번 뛰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5킬로미터니 10킬로미터니 하는 거리는, 고백컨대 목표를 이루려면 수치화 하라는 자기개발서 속 한 구절을 따라해 본 것이지 어떤 감도 없었다. ‘뭐? 축구장 옆 트랙 10바퀴? 그게 가능해?’ 라고 늘 생각했던 사람이 나였으니까.

그런데 없던 감도 만들어내게 하는 힘이 어딘가에 있었다. 손 안에, 바로 곁에. 멀리 떨어진 친구들은 SNS를 통해서, 동네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바로 옆에서 신발 끈이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줬다. 어쩌다 달리게 되었는지 묻는다면 이제는 머뭇거리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친구들이 있었다. 달밤에 달리기는 같이 못해도 오늘도 뛰러 가라고 말해주는 친구들, 며칠씩 미뤄둔 달리기 일기를 쓰면 기다렸다고 말해주는 친구들 덕분에 나는 차곡차곡 걸음을 쌓아왔다.


어쩌다(얻게 된 뜻밖에 행운 같은),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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