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이었다. 한 겨울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색색의 불빛으로 반짝거리는 도심을 지나 동네로 들어오자 이곳은 축제도 파티도 북적거리는 무엇도, 들떠 있는 어떤 것도 본 적 없다는 듯, 말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파트의 불빛, 가로등 조명, 초록과 빨강의 신호등 아래를 드물게 건너는 사람들 속으로 나 역시 들어섰다. 한 시간 전만 해도 나는 도심의 한 낮 햇살 같은 조명 아래 있었다. 그보다 몇 분 전에는 불 꺼진 관객석에 앉아 노란 조명과 검은 피아노를 바라보며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건반의 움직임과 연주자의 숨소리, 작은 허밍, 마지막 한 음과 공명하는 진동이 있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8번. 연주회 2부 곡이자 여름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내가 듣고 있던 음악은 도돌이 되는 선율로 내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듣고 있어? 내가 하는 이야기를?
'오늘이 하지라서 이렇게 더운가 봐요.'
오전에 즐겨 듣는 라디오 진행자의 말에 어느새 일 년의 반을 지나오고 있구나 실감했다. 하지가 되면 남중 고도가 가장 높고 낮 길이가 14시간을 넘어 이때까지 쌓인 열 때문에 더워지는 날이 이어지는 거라던데, 짝꿍 같은 겨울의 동지를 떠올리니 지금 여기가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매일, 꾸역꾸역 도장 찍듯 채워가는 사이 어느덧 딱 반, 중턱까지 왔다는 것을.
무더위의 시작, 여름의 한 복판, 저녁 7시였음에도 사위가 환한 광화문 사거리에서 물끄러미 인왕산의 얼굴을 올려다본 날, 나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곡을 들었다. 여름이어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슈베르트의 즉흥곡을 듣는 순간 나는 반짝이는 어떤 것을 떠올렸다. 남청색의 밤 사이로 흔들리는 초록의 나뭇잎과 아직은 습하지 않은 바람 속에 깜박이는 무엇, 그것은 청춘이었다. 피아노로 직조된 음악은 내 기억을 삼청동 언덕을 지나 북악산 팔각정까지 데려갔고, 그곳에서 내려다보았던 은빛 구슬을 엮은 도시의 실루엣과도 같은 청춘에서 멈췄다. 아득해서 아름다운, 그러나 막상 마주했을 때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그런 것. 멀리서 반짝였다가 가까이 다가서자 불을 꺼 버린 그것을.
살아서는 성공이란 걸 경험해 보지 못했고 가난에 시달리다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떠난 음악가 슈베르트이지만 음악만큼은 반짝이고 재잘댔다. 지금 태어났다면 인디신을 사로잡았을지 모를 자유로움과 비애가 곳곳에 묻어나는 그의 음악은 그저 청춘이었다. 인생의 여름, 청춘의 푸르름이 연주자의 손놀림마다 터져 나오는 아름다운 시간에 나 역시 2022년의 하지를 보내고 있었다. 반복되는 매일과 더는 나아질 것 없는 삶과 계획이란 것이 무색하게 흘러가는 운명 앞에서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것이 최선이고 꿈이 된 나에게, 그리하여 훗날 '그저 살았다'로 갈무리될 것 같은 나에게도 여름이 있었고, 다시 여름이 왔지만 그때의 여름은 아니었다. 연주회에서의 시간은 사그라진 청춘의 뒷모습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와도 같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슈베르트 소나타 18번을 반복해 듣는 동안, 200여 년 전의 그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자, 듣고 있어? 찬란하고 눈부신 시간은 어디서 언제 왔는지 모르게 사라지지만, 등 뒤엔 여전히 그때의 순간이 남아있어. 그러니, 듣고 있어? 나에겐 가난만 있었던 게 아니야. 나에겐, 시간이 있었어. 음악을 만들었고, 친구들과 누렸던 시간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사랑에 빠졌던 순간이. 그러니, 들어봐. 내가 하는 이야기를. 외롭고 고독한 순간을 헤매다가도 마주하게 되는 아름다움을.
실제로 슈베르트는 친구들과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라는 모임을 만들어 그의 작품을 연주하고 감상했으며 그것이 그의 기쁨이었다.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이 정작 괴테에게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해 좌절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의 우상과도 같았던 베토벤을 만나 극찬을 듣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다시 삶의 결들을 헤아렸다. 그가 사랑한 음악과 삶과 우정을, 그리고 그를 연주하는 연주자의 마음을, 묵직하게 생을 떠받치고 있는 왼손의 부선율이 지닌 무게를, 그 위로 달려가듯 흐르는 오른손의 음들을, 그 모두가 하나로 관통하는 2022년의 여름을. 그 순간들엔 어느 하나를 떼어내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눈앞에 당도한 하지의 여름밤에 앞으로는 맨발과 맨다리에 닿는 선선한 바람을 느낄 쯤에는 슈베르트를, 그의 소나타를 들어야겠다고 흰 불이 켜진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그와 함께라면 스산하지 않을 여름이 될 것이고, 슬리퍼 사이로 발가락을 까딱 거리며 경쾌하게 지나갈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된 올해의 하지를 그렇게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