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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쓰는 시

소설과 이야기 사이

by 산책


삼청동에서 계동으로 넘어가는 언덕 아래 철물점 앞엔 감나무가 있다.

어느 해 부턴가 가을에 삼청동을 지날 일이 생기면 철물점 앞에 서서 감나무 사진을 찍는다. 같은 파랑과 같은 주황, 같은 초록 사이에서 철물점의 어닝만 빛이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나무는 무얼 보고 무얼 기억할까, 나무가 무얼 보고 무얼 기억할 수 있을까, 나무는 서 있을 뿐이다. 가을 볕에 앞뒤로 반짝이는 감나무 잎을 내가 알고 있을 뿐이다. 내가 가지 않아도 나무는 있다. 그리고 네가 온 것을 나만 모를 뿐이다.

너는 아무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했다. 무엇으로도 어디에도. 글자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치우고 사라진 줄 알겠지만, 너는 나에게 감나무를 남겼다.

이제 나는 햇볕에 눈이 시리다. 감나무를 한참 올려다볼 수 없다. 어느새 감나무는 삼청동에서 지금 내가 있는 경기도 남부 까지 달려왔다. 나무가 말한다. 나를 그만 찍어. 나에게도 초상권이 있다고. 뭐라고? 그리고 얼마전에 가지치기를 당했어. 영 볼품없다고. 이번 가을엔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어. 어떤 미친 놈이 지나가다 철물점에 들어와서 나 때문에 살 수가 없다고 하는 거야. 장사 하루 이틀 하나, 주인 아저씨가 나가라고 하니까 하루가 멀다하고 와서 우는 거야. 뭐에 미친 건지. 뭐라고? 감나무 때문에 살 수가 없어요. 감나무가 자꾸 눈에 밟혀요. 아저씨 감나무 좀 잘라주세요. 듣다 못한 아저씨가 물었어. 대체 우리집 감나무랑 무슨 사연이 있는 거요? 저 감나무를 찍는 사람을 알아요. 그래서? 감나무가 없으면 그 사람도 더는 사진을 찍지 않을 테고 그럼 저도 그 사람 생각을 안 하겠죠. 뭐라고? 아저씨 제발 감나무 좀 잘라주세요. 제 마음은 자를 수가 없어요.

가지치기를 당한 감나무는 생선뼈 처럼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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