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베일리 어게인>
시사회 초대장을 받고 영화를 보기로 결심한 건 '라세 할스트롬Lasse Hallström'이라는 감독의 이름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척 봐도 강아지가 나오는 훈훈한 감동 코미디일 것이 분명한 이 영화를 굳이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 고민이 되었지만 라세 할스트롬이라니. <개 같은 내 인생>부터 시작해서 <초콜렛>, 그리고 내 인생 영화 중 하나인 <길버트 그레이프>까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 영화들이 모두 할스트롬 감독의 작품이었기에 이번에도 감독의 이름을 믿고 영화를 보러 갔다.
16살 즈음부터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나는 거의 이틀에 한 편 꼴로 영화를 보곤 했다. 명작이라고 꼽히는 유명한 영화들도 봤지만 한창 사춘기였던 탓인지 인디 영화에 빠져서,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그런 영화는 어디서 구했나 싶은 외국의 독립 영화들까지 열심히 봤다. 그 시절 봤던 영화 중 하나인 <길버트 그레이프>는 시드니 루멧 감독의 <허공에의 질주>와 더불어 고딩이었던 나의 심금을 울렸고, 자극적인(?) 제목에 이끌려 보게 된 <개 같은 내 인생>은 예상했던 내용과 정반대였던 탓에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한 후 제목과 포스터에 이끌려서 보게 된 <초콜렛>. 이 세 작품의 감독이 모두 라세 할스트롬이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계속 겹쳐지는 우연으로 할스트롬 감독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 사람은 항상 '사랑'을 이야기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다작을 하고, 주제도 다양하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일관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었다. 극 중에서 아무리 우여곡절이 있었더라도 마지막은 항상 훈훈하게 끝나는 것도 그의 영화의 특징 중 하나. 덕분에 찜찜한 마음으로 엔딩크레딧을 보는 일은 적어도 할스트롬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최신작 중 하나인 <베일리 어게인>(원제: A Dog's Purpose)도 예외가 아니다. 우선 '개'가 등장한다. 애초에 동물이 주인공인 영화치고 훈훈하지 않은 영화는 오히려 찾기 힘들지 않나. 그 탓일까, 여기에다 '감독 라세 할스트롬'까지 끼얹어지고 나니 따뜻, 훈훈, 감동이 조금 과잉되지 않았나 싶은 느낌도 든다. 영화가 시작하고 30분 정도 지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너무 유치하다"는 것. 영화가 중반에 접어들자 "너무 뻔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영화관을 나오면서 괜히 봤다고 욕을 했느냐 하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무척 재미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었다. 유치하고 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영화 속 웃음포인트에서 순순히 웃고, 감동적인 장면에서는 눈물을 흘렸다. 영화가 설치해둔 장치에 매번 걸려 넘어가면서도 즐거울 수 있었다. 뻔한 만큼 확실한 재미와 감동이 있고, 유치한 만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 <베일리 어게인>을 보고 느껴지는 감상이 딱 이랬다.
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인간뿐인 줄 알았다면 오산이라고 말하듯, 영화는 강아지 베일리가 자신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런 궁금증을 품었기 때문이었을까, 베일리는 생을 마감하고 다시 태어나도 이전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유가 정확히 명시되지 않지만) 아주 짧은 생을 끝내고 두 번째 삶에서 만나 함께 살게 된 소년 이든은 베일리 인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인물이다. 누군가를 만나 제대로 '살아' 보는 건 처음이라 베일리는 그야말로 천방지축. 베일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말썽을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든네 가족은 보살인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베일리가 성장해 나가는 모습도 흐뭇하지만, 동물 영화의 묘미는 그러한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제3의 눈으로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이던이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고, 가족에 변화가 생기는 등 주인공들에게 닥치는 사건 사고마다 베일리가 함께 하면서 자기 자신의 '견생' 경험치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인생 경험치가 어떻게 쌓여나가는지를 목격하고 들려준다.
무엇보다 베일리가 계속해서 환생을 한다는 사실은 베일리의 '반려인간'이 계속해서 바뀌게 해 주고, 이로부터 이던이라는 한 명의 인물 외에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일면이 그려진다.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인간이 동물과 함께 하는 다양한 방식이 여실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집단으로 사육되다가 이유도 모른 채 안락사를 당하기도 하고, 운 좋게 좋은 '반려인간'을 만나 행복하게 살기도 하며, 어려서부터 경찰견으로 길러져 일을 하다가 순직하거나, 무책임한 인간 덕분에 일평생 한 곳에 매여 감옥 같은 나날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이건 인간의 입장에서 봤을 때, 동물과 함께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를 (혹은 함께 했던 자신의 모습이 어땠는지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만들어준다. 자신의 반려동물을 행복하게 해줘야겠다고 한 번 더 다짐하게 하면서. 재미와 감동뿐만 아니라 일종의 기능성도 있는 셈이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는 으레 이런 개그 코드가 삽입돼있기 마련이지" 하는 예상을 뒤엎지 않고, "이쯤 되면 이제 감동적인 장면이 나올 타이밍이지" 하는 식으로 전형적인 플롯의 완급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베일리 어게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분 좋은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한다. 뻔하고 유치한 영화의 꽤 많은 수가 관객들에게 억지웃음을 강요하고 극 후반부에 급작스럽게 신파로 빠지면서 눈물을 짜낼 것을 요구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기분 좋은 훈훈함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꽤 잘 만든 것이다.
애초에 재미와 감동이 보장되어 있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살면서 한 번이라도 동물과 함께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즐거움과 감동을 배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좀 더 공감할 수 있고, 지난 추억을 돌이켜볼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나와 함께 했던 그 아이를 나도 언젠가 다시 한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도 한 번쯤 꿔볼 수 있다. 더불어 아이들을 위해서도 좋은 영화가 될 것이다. 교육용에서 좋을 것 같다는 말이 아니라, 순전히 아이들이 보기에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영화 전반부는 아이들을 노리고 만들었나 싶은 느낌도 들고 말이다.
끝으로, 이번에 할스트롬이 <베일리 어게인>이라는 강아지가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 사람 어지간히 개가 좋은가 보구나 싶었다. <개 같은 내 인생>에서는 제목부터 개가 등장했고, 리처드 기어가 등장하는 <하치 이야기>도 라세 할스트롬 작품이다. 그리고 이제는 베일리까지.
개를 비롯하여 평생 동물을 사랑해왔다고 스스로도 자신하는 할스트롬 감독인데, 사실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그는 구설수에 휘말렸다. 영화에서 경찰견이 급류에 뛰어드는 장면을 촬영할 때 해당 역할을 맡은 개가 물속에 뛰어드는 것을 두려워하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강요하는 현장이 담긴 영상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동물학대가 아니냐는 비판이 일자, 할스트롬은 본인 또한 영상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고, 당시 상황은 현장에 자신이 부재했을 때 벌어진 일이어서 이에 대해 알지 못했으며, 담당자가 누구였는지 밝혀 책임을 물을 것이고 만약 자기가 있었다면 결코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한 해명 이후에도 동물보호단체 등의 영화를 보이콧하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지만 말이다.
(* 이 일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관련 회사는 영상 속 상황 직후 개가 안정을 찾고 촬영할 준비가 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기다렸으며,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고 개도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입장을 밝혔다)
아무쪼록 이번 일로 인해 할스트롬도 속이 많이 상했겠지만, 앞으로 영화를 제작할 때 동물 배우들의 복지에 보다 큰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은 틀림없을 듯하다. 앞으로도 그가 동물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걸 그만둘 일은 없을 것 같고 말이다.
앞에서 언급된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다른 영화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다면:
<개 같은 내인생> (1985)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2791
<길버트 그레이프> (1993)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6462
<초콜렛> (2000)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2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