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린 북>
뉴욕 출신의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그 아이는 미국에 올 거라면 뉴욕이 제일 좋다는 식의 말을 했다. 그건 네가 뉴욕 토박이여서 그런 것 아니냐며 웃는 나에게 그 아이는 진지한 얼굴로, "미국은 남쪽, 서쪽으로 갈수록 이상해지고weird 동쪽, 북쪽으로 갈수록 정상이야normal"라고 말했다. (뉴욕은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순간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오가며 여기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결국 미적지근하게 그건 너무 고정관념stereotype이 아니냐며 되묻는 나에게 그 아이는 다시 한번 확고하고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건 고정관념이 아니라 사실fact"이라고.
그 친구가 이처럼 단호하게 말한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흔히 개방적이고 도시적인 북동부와 그 대척점에 있는 남서부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지역차, 그 차이를 만들어 냈을 수많은 역사적 요인들, 그리고 내가 '동양인'으로 분류된다는 사실과 동양인 혼혈로서 미국에서 살아왔던 그 친구의 삶 등등. 친구가 저렇게 말하기까지는 많은 이유와 사연들이 얽혀있었을 것이다. 남쪽과 북쪽, 서쪽과 동쪽이라는 카테고리에 따라 분류되는 지역들과 그 카테고리마다 달리는 꼬리표들을 그대로 믿는다면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쾌한 일을 피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꼬리표가 사실이 아니라면—정말 단순히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면—생사람을 (여기서는 생지역을?) 잡는 꼴이 된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리스크를 만들어낸다. 꼬리표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여기 이 두 사람에게도 꼬리표가 붙어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겉모습부터. 둘 다 남자이지만 토니(비고 모르텐슨 분)는 백인이고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분)는 흑인이다. 다수가 존재하는 이상 어떠한 기준으로든 분류는 가능하기에 사회와 시대는 항상 다수를 보다 적은 그룹으로 나누고, 그 그룹을 설명하는 꼬리표를 붙여왔다. 물론 사실이고 아니고는 상관이 없다. 사회의 권력 계급에게 이득이 되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조금만 더 둘의 모습을 살펴보면 토니는 못 배우고 가난한 하루살이 노동자라는 걸 알 수 있고, 셜리 박사는 그 호칭이 말해주듯 "배우신 분"인 데다가 부유하며 잘 나가는 피아니스트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여기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삶의 모습이 대충 어떻겠거니 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그런데 이때 토니가 입을 열고 몇 마디 말을 해준 후 뉴욕 브롱스Bronx에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 순간 우리는 '저학력 빈곤층 노동계급'이라는 꼬리표에 '브롱스에 사는 이탈리아계 이민자'라는 수식어까지 붙일 수 있다. '브롱스'라는 지역과 '이탈리아계 이민자'에 붙는 꼬리표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면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토니의 거친 말씨에는 이탈리아어 억양이 강하게 남아있고, 무력을 사용해 나이트클럽 내 소란을 해결하며, 그의 이탈리아계 친지들과 가깝게 지내고, 심지어 먹는 걸로는 어디 내놔도 지지 않는다는 점까지. 그는 사회가 그에게 붙여놓은 꼬리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돈 셜리는 조금 다르다. 그에게 달려있는 '고학력 부유층 예술가'라는 화려한 꼬리표는 그가 가진 또 하나의 꼬리표—'흑인'이라는 꼬리표에 의해 완전히 가려지는 일이 허다하다. 무대 위 또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고학력 부유층 예술가'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좋은 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그가 피아노를 치던 말던 상관이 없는 세상으로 내려오는 순간, 그는 그저 한 명의 '흑인'으로서 대접을 받을 뿐이다. '이탈리아계 이민자'인 토니를 조롱하다가 한 대 맞은 '백인' 경찰관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흑인'인 셜리도 함께 유치장에 잡아넣고, 길을 가다가 우연히 눈에 띈 정장을 입어보려 상점에 들어가면 '흑인'인 셜리에게는 시착이 허락되지 않는다.
지금도 인종차별 문제가 계속되고 있지만, 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영영 접점이 없을 것 같던 토니와 셜리 박사가 만나게 되는 계기도 바로 그것이다. '흑인'인 셜리가 다른 곳도 아니고 '남부' 투어를 해야 한다는 것. 흑인이라는 이유로 아무 여관에 묵을 수도 없고, 그저 길만 걸어도 이유 없는 시비가 걸려오는 상황에서 투어 중에 일어날 수 있는 소동을 제압하기 위한 해결사로 토니가 고용된 것이다.
'흑인' 보스에 '백인' 운전수. 당시 각각의 타이틀에 딸린 꼬리표로 보자면 영 흔치 않은 조합이다. 사실 토니 또한 '흑인'이라는 이름에 붙는 꼬리표를 앞장서서 거부하는, 그런 깨어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흑인이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멀쩡한 유리잔을 버려버리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저 어쩌다 보니 돈이 똑 떨어졌을 뿐이었고 마침 셜리에게서 일을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돌아오는 것을 목표로 셜리를 따라 이주 간의 여행길에 떠난 토니는 그때부터 셜리에게 붙여진 꼬리표가 얼마나 부당한 일들을 많이 일으키는지 직접 체험하게 된다.
그가 운전대를 잡자마자 건네받게 된 '그린 북'의 정체는 바로 흑인이 이용할 수 있는 숙소나 식당 등을 소개하여 흑인 여행자가 여행 시 맞닥뜨리게 되는 불쾌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한 가이드북이었다. (왜 '그린Green 북'이냐면 이 책을 집필한 사람 이름이 Victor Hugo "Green"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까지 있나 하고 놀라는 토니. 하지만 피아니스트이면서도 흑인 뮤지션들이 활약하는 재즈 음악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셜리에게 왜 "당신네 사람들" 음악을 모르냐 라고 묻는 등 아직 무식함을 많이 보여주는 그이다. 이렇게 무식한 토니를 보다 고상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말씨며 작문이며 행동거지며 하나하나 지적해주는 사람은 '흑인' 돈 셜리. 사회가 '흑인'과 '백인'에 붙여놓은 꼬리표 대로라면 이 둘의 입장이 바뀌어야 하겠지만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그들의 모습은 그러한 꼬리표를 보란 듯이 거부한다.
이렇게 불쾌함을 무릅써가며 투어를 진행하는 셜리의 연주회에는 누가 관객으로 오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바로 백인들이다. 그것도 전부 상류층의 고상한 백인들. 그래도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라 인종차별은 안 하나 보네 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놓는 건 너무 순진한 일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의 통념을 반전시키는 데에서 오는 통쾌함도 이 영화에서 손꼽히는 재미이자 매력이지만, 내가 특히 마음에 들었던 점은 극중에서 셜리가 이것이 백인들의 위선이라는 것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셜리가 '흑인 피아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흑인 뮤지션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인 채로—'백인들의 세계'에서 잘 나가게 된 것은, 물론 그의 실력이 출중한 이유도 있겠지만 백인 상류계급이 그의 '흑인' 타이틀을 자신들의 또 다른 타이틀을 위해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백인이지만 인종차별은 하지 않아. 이렇게 '흑인' 피아니스트의 연주도 즐길 줄 아는 걸"이라고 대내외적으로 뽐낼 수 있는 기회를 그들을 원했던 것이다. '교양 있는 상류층 백인'이면서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갖기 위해 그들은 셜리를 초청하고 연주회를 연다.
이러한 행동이 위선임이 드러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직접 셜리를 초청해놓고도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이들과 함께 식당 홀에서 밥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 손바닥만 한 창고를 대기실이랍시고 제공하는 것,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야외에 있는 '흑인용' 화장실을 사용하라고 하는 것 등 백인들의 세계는 셜리가 주무대로 활동하는 곳이면서도 그가 발붙일 곳이 되어주지 못한다.
그렇다고 셜리가 흑인 세계에서 환영받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그는 사회의 '흑인' 카테고리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재즈보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셜리는 음반 업계가 '흑인 뮤지션'에게 기대하는 바를 보여주는 음악가도 아니며, 미국 내 다수의 흑인들의 생활수준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우아하고 부유한 삶을 산다. 백인들이 있는 곳에선 흑인이라는 이유로, 흑인들이 있는 곳에선 흑인인데 왜 그러냐는 이유로 이리저리 치이는 셜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왜 매일 밤, 아무도 없이 혼자서 위스키를 마시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그래서 나는 셜리가 초청받은 곳의 식당에서 쫓겨나 토니와 함께 들어간, 흑인들이 주로 오는 바에서 맨 처음 연주한 곡이 쇼팽의 즉흥환상곡이어서 참 좋았다. 흑인이기 때문에 클래식 연주자가 되지 못했던 셜리가 흑인들의 공간에서 재즈가 아닌 그가 사랑하는 쇼팽을 연주한다. 그렇지 않아도 초반의 카리스마가 엄청난 곡인데 (그래서 옛날에 피아노 학원에서 자랑용으로 많이 치곤 했었다) 그가 서러운 일을 당하고 나서 한 맺힌 듯 즉흥환상곡을 연주하는 걸 듣자니 울컥하며 눈물이 다 났다. 그 장면에서 운 건 나밖에 없었던 것 같지만...
로드무비가 으레 그렇듯, <그린 북>도 둘의 여정이 끝나감과 동시에 갈등의 해소도, 정신적인 성장도 마무리된다. 토니는 이제 더 이상 흑인이 사용했다고 유리잔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셜리도 이전만큼 외롭지는 않다. 토니네 대가족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훈훈한 분위기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배경으로 영화의 엔딩 또한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실화를 모티브로 한다는 점,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주제, 좋은 연기, 때마침 크리스마스라는 훌륭한 타이밍, 재즈부터 클래식을 아우르는 사운드트랙, 당대의 사회 모습을 잘 그려낸다는 점 등 대중적으로나 시상식 후보로서나 두루두루 좋은 조건을 갖춘 영화이다. 영화는 좋지만 그러한 영화를 뒤로 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썩 훈훈하지만은 않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꼬리표와 그 꼬리표가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더더욱.
'여자'인 나는 지난 화요일 영화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생각보다 늦게 끝났지만 아직 거리에 사람들이 많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양인'이기도 한 나는 몇 년 전에 영어를 왜 이렇게 잘하냐고,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것 아니냐고 묻는 코카시안을 쓴웃음을 지은 채 바라보며 뭐라고 대꾸할까 고민했었다. '철학'을 전공한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종종 전공을 밝힐 때마다 상대로부터 안쓰러운 눈빛을 받곤 한다(...) 방탄소년단이 교복을 입고 나와 상남자를 추던 시절부터 팬이었던 나는 그들이 세계에서 'K-Pop'이라는 카테고리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그들 자체로 평가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국적은 한국이면서 철학을 전공한 동양인 여자'로 분류되는 데에 불만은 없다. 이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거기에 따라붙는 꼬리표들과 그 틀에 얽매인 시선들은 거부하고 싶다. 그러다가 <그린 북>의 셜리처럼 매일 밤 혼자서 위스키를 마시는 신세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셜리도 토니를 만났지 않은가. 꼬리표를 거부해도, 분명 좋은 친구 한 둘쯤은 생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믿고 싶다). 물론 가장 좋은 건 꼬리표 자체를 붙일 일이 없어지는 일. 꼬리표를 붙일만해도 억지로 붙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꼬리표가 생길만한 일이 없는 것일 터. 그렇다면 셜리는 아무런 소동 없이 남부 투어를 마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의 내 친구도 나에게 북동부에 국한되지 않은, 미국 전역을 추천해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영화 속에서 셜리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이 전신샷으로 잡히길래 이를 보고 배우 마허샬리 알리가 직접 연주했나 하고 궁금해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라고 한다.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크리스 바워스Kris Bowers가 연주한 음악에 알리가 손으로 싱크만 맞춘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