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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피 Jul 30. 2023

우거진 정글 속, 신비의 마야 도시

치아파스의 팔렌케에서

열대 밀림 속 신비로운 마야 도시, 팔렌케


고산지대였던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에서 저지대인 팔렌케로 내려오자 푹푹 찌는 더위가 제일 먼저 우릴 반겼다. 시원했던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피부로 느껴지는 습기와 꿉꿉함에 산 크리스토발의 선선한 날씨가 사뭇 그리워졌다. 큰 땅덩이와 더불어 적도와 가까운 열대 지방의 기후와 고산 지대가 합쳐져 같은 시기에도 지역에 따라 여름에서 겨울까지 다양한 기후를 경험할 수 있는 멕시코였다. 이번엔 저지대의 고온다습한 날씨를 견딜 차례였다.


팔렌케까지의 여정은 상당히 고되었다. 두 마을 사이를 높은 산지가 가로막고 있는 데다, 열대 밀림 속에 자리한 위치 덕에 접근성이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렌케행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과테말라의 티칼, 온두라스의 코판과 함께 세계 3대 마야 유적 중 하나로 손꼽히는 팔렌케 유적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깊은 밀림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팔렌케 유적은 의외로 마을에서 8km 정도 떨어진 꽤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마을을 금세 벗어난 차는 양옆으로 울창한 나무가 줄줄이 이어지는 쭉 뻗은 직선도로에 접어들었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열대 지역의 위용을 뽐내듯 강한 태양이 검은 도로 위에 내리쬐고 있었다.


서서히 산길을 오르는 동안 차창 밖으로 드넓은 초록의 밀림이 펼쳐졌다. 시야를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로 넓고 빽빽이 밀집된 숲은 강렬한 태양빛을 받아 짙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과연 우리가 지금 열대 밀림 지대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고 있었다. 드넓은 초록의 바다 아래 잠자고 있을 고대 문명의 유적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팔렌케를 둘러싼 깊고 울창한 밀림 @숲피


멕시코 정글의 한가운데 숨어 있는 고대 유적


팔렌케 유적은 국립공원 안에 있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만큼 주변 관리도 철저히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기념품을 파는 노점을 지나고 덩굴이 무성한 길을 걸어 나가 마지막으로 계단을 올라가니 드넓은 평지에 팔렌케 유적지가 펼쳐졌다. 와······. 속에서부터 깊은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나는 잠시 말을 잃고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거대한 석조 피라미드가 고요한 아침의 풍경과 맞물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팔렌케 유적 @숲피


팔렌케는 깊은 밀림에 파묻힌 덕에 무려 800년이란 시간 동안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채 정글 속에 버려져 있었던 곳이다. 심지어 지금까지 발굴된 곳이 도시 전체 면적의 10%도 되지 않는다고 하니 그 규모가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산길을 올라오면서 보았던 드넓은 밀림 숲을 떠올리자 오랜 시간 발견이 되지 못한 게 납득이 가기도 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새삼 믿기 어려웠다. 거대한 궁전과 신전, 경기장까지 갖춘 거대 도시를 수천 년의 시간을 지나 거닐었다. 빽빽한 밀림 한가운데 고대 마야 문명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도시가 그 웅장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팔렌케 유적의 피라미드 @숲피


팔렌케의 피라미드 중 가장 높은 십자가 신전에 올랐다. 수십 개의 계단을 오르자 지금껏 지나온 피라미드들의 전경과 함께 저 멀리 초록빛 밀림의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안개 낀 필터를 하나 겹친 것 같이 주위를 둘러싼 넓고 깊은 밀림의 풍경은 팔렌케 유적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우거진 정글 속에 남겨진 팔렌케 유적의 낡은 잔해 @숲피


습기를 가득 머금은 대기가 일렁이는 모습이 마치 대지가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아래로 무언가를 숨겨놓은 듯 비밀스러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의 소리가 저 멀리 어딘가에서 들려오고, 우거진 나무의 촉촉하고 상쾌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그야말로 원시의 꿈틀거리는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동안 멕시코에서 치첸이트사, 테오티우아칸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유적지들을 방문했지만 내게는 팔렌케가 가장 인상 깊었다. 고대 마야 문명의 비밀이 오랜 시간 동안 숨겨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깊고 울창한 밀림은 아직까지도 수많은 수수께끼를 그 속에 품고 있다. 그래서 더욱 신비로운 팔렌케는 야생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대 유적지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팔렌케 유적지에서 파는 기념품 @숲피


치아파스의 숨은 보석, '아구아 아술'


3시간이 넘도록 유적지의 땡볕 아래서 시간을 보낸 우리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시원한 폭포였다. 땀으로 끈적해진 몸을 얼른 시원한 물에 담그고 싶었다. 피할 수 없는 열대 지역의 눅진한 습기가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었다. 네덜란드, 독일, 멕시코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다음 장소로 가는 투어 차량에 몸을 실었다. 


치아파스 주의 열대 밀림 지대 주변에는 자연이 만들어낸 수많은 볼거리들이 있다. 특히 팔렌케의 남쪽에는 충분한 강우량과 정글과 같은 기후, 산악 지형이 만들어낸 다양한 캐스케이드와 폭포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아구아 아술'은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푸른 물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아구아 아술로 가는 짧지 않은 여정 중에도 끝없이 펼쳐진 너른 밀림의 풍경이 다시금 내가 지구 반대편에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주차장에서 내려 얼마 걷지 않아 폭포가 나타났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단연 물의 색깔이었다. 자연이 만들어낸 색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우유를 섞은 불량 소다 맛이 날 것 같은 그런 뽀얀 에메랄드 빛깔이었다. 에메랄드빛 폭포가 만들어낸 웅덩이에서 사람들이 몸을 담그고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신난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와 물장구치는 소리가 혼재되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어른들은 물가에 앉아 발을 담그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따로 없는 모습이었다.


에메랄드 빛의 아구아 아술 @숲피


자연이 만들어낸 놀이터에서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연히 마음에 경계심을 풀게 했다. 그러고 보면 마음은 참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곤 하니까. 평소라면 낯선 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을 향해 올렸을 가드도 내리고, 마주치는 족족 웃음을 머금고 있는 눈들을 향해 나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 더위를 피해 시원한 여름을 나기 위해 피서를 온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정다웠다. 기분 좋은 소란함이었다.


규모가 꽤 큰 폭포를 따라서 산책로가 조성이 되어 있었다. 끊이지 않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울창한 나무가 만들어 낸 그늘막 아래를 따라 걸었다. 형형색색의 기념품과 갖가지 음식을 파는 야외 노점이 길을 따라 쭉 늘어서 있었고, 그 주위를 닭들이 자유롭게 노닐고 있다. 물이 마찰을 빚어 생겨나는 소리는 듣기만 해도 더위를 시원하게 날려 주었다. 눈도, 귀도 즐거운 산책길이다. 


폭포의 상류엔 확실히 사람이 적었다. 가지고 온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폭포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공기와 차가운 물이 뒤섞여 적정한 온도를 만들어냈다. 며칠에 걸러 한 번꼴로 적게는 3시간에서 많게는 10시간이 넘게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던 우리에겐 고된 여정 사이 쉼표 같은 시간이었다. 내일 또다시 몇 시간 동안 몇 번에 걸쳐 다음 목적지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견딜 만해졌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아구아 아술의 전경 @숲피


평소보다 이르게 찾아온 여름


수면에 닿아 피어나는 보글보글한 물안개, 끊임없이 귓가를 맴도는 시원한 폭포 소리, 떨어지는 물줄기가 만들어낸 하얀 물의 장막, 폭포 기슭에서 물장구치는 사람들, 바위의 모든 틈을 비집고 뿜어져 나오는 폭포수가 3월임에도 뜨거운 여름임을 실감 나게 했다. 평소보다 이르게 찾아온 여름이었다.


그때의 나는 길어진 여행에 때로는 지쳤고 때로는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여행을 떠나온 지 막 반년을 넘겨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끝없는 이동에 체력은 바닥나고 있었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서 뿌연 안갯속을 걷는 것 같았다. 즐겁다가도 난데없이 막연한 불안감이 덮쳐올 때면 절실함이 사라지고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맘껏 헤매기 위해선 체력과 돈이 든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햇빛이 들이치는 아구아 아술 @숲피


그날의 폭포는 꽤나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이색적인 풍경도, 오랜만의 물놀이 때문도 아니라 절벽을 떠난 물줄기가 밤낮없이 힘차게 떨어진다는 사실이, 어딘가에서 흘러와 어딘가로 흘러간다는 사실이 그때의 나에게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복잡했던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을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내 안에 작은 믿음의 씨앗을 심어 주었다. 내가 가는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몰라 두려울 때에도 우선 내 앞에 놓인 길을 묵묵히 가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해 있을 것이라는 그런 믿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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