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연히 학군지 리뷰 글을 클릭했다. 글에는 개포, 반포, 대치동이 단순 학군 비교가 아니라 재건축 일정, 시세, 토지 허가 여부, 환경 등을 고려하여 비교되어 있었다. 그중 내가 살아 본 두 아파트가 시세와 함께 언급되어 있어서 반갑고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학군지 중 내가 살아 본 첫 번째 아파트는, 곧 입주가 시작된다는 <개포 디에이치 퍼스티어 아이파크>다.
이름이 길기도 하다. 나는 이 아파트의 전신인 개포 주공 1단지에서 유년시절의 반을 보냈다.
당시 전세로 살고 있었지만 우리에겐 그 집을 두 채 살 돈이 있었단다. 내가 살던 1단지는 평수가 작았고 유치원 단짝 윤이가 살던 2단지는 넓었던 기억이다. (1, 2 단지 내에도 다양한 평형이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윤이의 부모님은 의사였고, 수시로 외국을 다녀오셨다. 내 인생 처음 플레이도우를 만져본 곳이 1989년 여섯 살, 수입 장난감으로 가득한 윤이네 집에서였다. 이 수입 점토에서 나던 달콤한 향기와 세련된 파스텔 색감 틀을 보았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울 엄마가 생일이 되어야만 사주셨던 미미, 쥬쥬 중에서도 "반지를 대면 저절로 문이 열리는 튤립 성 미미 인형" 만큼이나 강렬한 기억.
윤이랑 함께 유치원을 졸업하고, 개원 초등학교에서도 3학년까지 함께 다녔다. 어느 날 윤이는 천당 아래라는 분당으로 이사를 갔고, 울 엄마가 던진 청약의 승부수는 모두 고배를 마시다가 '강북구 신축 아파트'로 낙점되었다. 갈까 말까 고민을 할 때, 개포 아파트 집주인이 엄마에게
"내가 집이 두 채이면 절대 안 되는 곤란한 상황이 되었으니 지금 전세 맡긴 돈에 딱 200만 원만 얹어서 이 집 좀 사라."라고 애원했단다.
두 채 살 돈도 있었다는 엄마는...... 이 낡은 집이 지긋지긋했고, 친정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신축 될 강북의 아파트가 운명이라 생각하고 결단을 내렸다.
당시 아빠는 (사촌) 큰 아빠의 잘 나가는 세무사 사무소에서 함께 일했고, 큰 아빠네는 은마 아파트에 살며 차를 자주 바꾸며, 해외여행을 다녔다. 내가 사촌 언니를 너무 좋아해서 은마 아파트를 수시로 드나들었던 기억, 중간쯤에 있는 그랜드 백화점에서 롤러브레이드를 사서 함께 탔던 기억, 그랜드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어린이 수영 강습을 받았던 기억도 난다. 계몽 아트홀에서 글짓기 수업을 들었던 기억도.
우리가 강북구로 이사할 때, 큰 아빠네는 분당으로 이사하며 사촌 형제는 헤어졌다. (그 후 두 남자와 그의 가족들은 각각 험난한 세월을 사느라 다신 볼 수 없었다.)
내가 살아 본 두 번째 학군지, 반포 래미안 원베일리의전신인 반포 경남 아파트.
고속버스 터미널 지하상가 끝에 닿아 있었던 반포 경남아파트의 넓은 평형. 이곳에 우리 신데렐라 막내 이모네가 살았는데, 나는 여기 방 한 칸을 차지하고 같이 살며 대학 생활을 했었다. 이모네 있으면 엄마에게서 벗어나 숨통이 트이는 데다 학교가 가까워 좋았고, 이모는 어린 아들을 돌보아 줄 가정교사 겸 보모로 나를 묶어 두는 게 좋았다. 내게 아들을 맡겨두고 자유롭게 사우나로 놀러 다닐 수 있었고, 아홉 시 뉴스 후 드라마 시간인 열 시에 재워 달라 징징 울면 내게맡길 수 있었다. 나는 작은 침대에 사촌 동생과 비좁게 누워서 어린아이들은 자라고 할 때 쉬이 잠들지 않는다는 것, 자려고 누우면 쉬가 마렵고, 잠들어 가다가도 목이 마르다는 것, 그럴 땐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것을 체험했다.
이모의 골프 여행에도 보모로 따라가서 리조트에 남아 아이를 어르고 달랬던 기억, 이모부를 따라다니며 맛있는 걸 먹을 땐 가족 생각이 났던 기억. 그렇지만 그 덕에 길 건너면 반포 한강 공원인 아파트에 살며 배우고 싶었던 검도를 배우며 이모와 함께 킴스클럽에서 쇼핑도 하고 알바도 했고 ㅡ와인 코너에 팔짱을 끼고 서있던 한가인 연정훈 부부를 보았던 기억이ㅡ있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졸업 학년 여름 방학에 이모를 따라 시드니에서 두 달을 지내고 올 수 있었다.
당시 초1이던 사촌동생이 호주 3대 명문이라는 사립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 3년을 지내던 시기였는데 어김없이 나를 부르는 이모의 비행기표 제공 유혹에 냅다 쪼르르 달려갔던 것.
시드니에서도 넉넉한 평수의 아파트, 이모 차를 타고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때 아직 인연이 닿지 않은 상태였던 남편도 호주에 있었다. 바나나 농장에서...머리와 턱수염을 길게 길게 기르고 워킹홀리데이를 하다가 시드니에 놀러 왔을 때 같은 랜드마크에서 비슷한 날짜로 찍힌 사진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반포래미안 퍼스티지.
동생과 이모가 호주에 있는 동안 기러기 부부였던 이모네는 돌아오면서 경남 아파트를 팔고신축 아파트인 반포 래미안 퍼스티지로 이사했다. 퍼스티지에서도 반포 종합 운동장이 바로 내려다 보이고 담장 너머가 세화여고인 동 이었다.
여기서는 내가 취직을 해서, 밥솥 회사를 다니며 자주 머물렀다. 터만 다져 놓아 마야 문명 유적지나 우주 계획도시 터처럼 보였던 반포 자이의 땅 덩어리를 구경했던 기억도 난다.
이곳에 있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만난 지 1년 반 만에 결혼을 하게 됐다.
연년생 자매를 낳고 3년 동안 내향적인 성격에 맞지 않는 북클럽 영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많은 좋은 집들에 드나들었다.
송파구에 올림픽 기자촌 아파트가 있는데, 생각 없이 안에 들어갔다가 표정을 감출 수 없이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탑층이 아닌데 복층인 아파트라니!
복층 아파트는 처음이었다.겉은 허름하고 오래된 아파트였지만 내부는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은 멋진 모습이었다. 그곳에서 고객인 아이의 책도 읽어 주고 놀아주고, 전집을 권유하거나 회원 업그레이드를 권유했었다. 쉽지 않았다. 돈이 많아 보였지만, 속사정도 많았다.
그 밖에도 여러 주상복합 아파트와 브랜드 아파트들을 많이도 돌아다녔다. 비싸다는 집들 말이다.
꾸준히 오르다가 20억이 우습게 된, 옷깃이 스쳤던 아파트들을 보며 신기하게도 우리 가족 누구도 한탄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두 채 살 돈이 있었는데......" 하시는 걸 보면 아쉬운 마음은 있으신 듯 하지만.
아마, 우리가 개포동 집을 놓치지 않았어도 우리는 부자가 되지 못했을 거다. 이유는 사람에 있다. 아빠는 재산이 늘면 느는 만큼 저당 잡아 사용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대접한다고, 사회생활이라고, 잘 나가는 사무소에 다닌다고 점점 커진 씀씀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엄마가 아무리 절약하고 재테크를 한 들 폭죽 터지듯 높이 치솟아 터지는 빚들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아빠가 전문직도 아니고 주공 1단지 꼭 붙잡고 살았던들 나와 남동생의 덩치는 점점 커져 집은 좁고, 주위는 그야말로 강남... 잘 나가는 집안 자제들로 채워진 학군지인데 기죽지 않고 학교를 잘 다닐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생각으로만 하다가, 스무 살 무렵 '다모임' 커뮤니티를 통해 아직 그곳에 남아 살고 있는 비슷한 형편의 친구를 만났을 때, 그 친구의 침울한 표정과 말하지 않는 고민들이 마음에 훅 끼쳐 왔을 때 생각은 확신이 되었다.
우리는 재건축하고 입주가 시작되는 2023년까지 그곳에서 버틸 재간이 없었을 거다.
이모부는 소형 건설회사의 오너이기에, 이모부 본가 쪽이 워낙 부유하기에 강남에서 생활이 몸에 맞는 옷 같았지만 부동산 하나에 대롱대롱 매달렸을 우리 가족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모부 부부에게도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학벌. 1년에 1억씩 비용을 들여, 아이를 조기 유학까지 보냈었고 8 학군 명문고를 졸업시켰지만 대학은 인서울에 실패했다.
나는 깨달았다.
부동산으로 부를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타이밍, 하늘이 내린 운이 필요하지만. (그것도 이를 악문 노력으로 얻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떻게 얻었던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그 사람의 그릇이다.
시할아버지가 한강 근처에 작은 빌딩을 남겨주셨더니 시아버지께서 바로 사업으로 날려 버리신 것처럼,
학군지에서 부유하게 자라며 교육을 받아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는 그 사람의 그릇인 것처럼,
실컷 써보라고 용돈으로 받은 현금 10억을, 더 크게 불려 보겠다고 돈놀이를 하다가 강남 사우나 동료들에게 고스란히 다 뜯긴 이모처럼,
재산이 느는 족족 빚도 불려 왔던 아빠처럼.
그리고 좋은 집, 높은 층에 살지만 양가와 얽힌 재산 문제, 부부 사이, 고부 갈등, 자녀 걱정 등으로 각자의 시름을 안고 있던 저마다의 표정을 보며
나는 되레 좋은 집이란 곳에 살아 봤자 별거 없더라, 행복은 집 값과 집 크기에 상관없더라는 결론을 내렸던것 같다.
호기롭게 단칸방부터 가자, 큰소리를쳤고 이제는 창문을 실컷 열 수 없는 퍼스티지 보다 판상형으로 바람 씽씽 통하고 볕이 잘 드는 낡은 우리 집이 더 좋다고 생각하며.
.....그렇지만 정신 승리도 쉽지가않다.
좋은 마음 그릇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닮아가며, 조촐한 집에 사는 정도는 할만할 줄 알았는데 힘에 부친다. 아닌 척하며 큰 욕심을 부렸던 걸까? 공황은 왜 생긴 걸까?
내 것이 아닌 것은 내 그릇에 담을 수 없는 것이라 갖지 못한 것이니, 욕심으로 앓지 말고. 나의 그릇에 담긴 것들에 감사하며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