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 전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 1500 여명 규모의 컨퍼런스를 주최했습니다.
해외 연사가 꽤 많이 참여하는 컨퍼런스여서 각 세션 홀마다 동시통역이 제공되었습니다. 하루종일 총 3개의 홀에서 세션이 동시에 진행되었기에 동시통역사 총 6분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저도 직접 리시버로 통역 내용을 들어보고, 컨퍼런스 기획 담당 팀과 현장에서의 반응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 컨퍼런스 동시통역의 현주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1. 전문분야 세션 통역은 잘하는지 못하는지 티가 잘난다.
기초적인 업계 용어가 매끄럽게 통역되지 않을 경우 통역에 대한 신뢰가 확 떨어집니다. 전문적인 분야에 국한된 세션인 경우 영어를 잘 못알아듣는 사람도 업계 용어는 한국어와 영어로 다 알고 있는 편이라 더 티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해당 분야에 배경 지식이 많은 사람이 결국 통역을 잘 할 수 밖에 없습니다.
2. 공백없는 통역이 제일 좋은 통역이다.
차분하게 공백없이 술술 말을 풀어주는 통역사의 목소리에 확실히 더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어떤 남자 통역사의 경우 약간 사투리가 느껴져서 통역이 좀 불안할 것 같았는데 영-한 통역을 어찌나 청산유수로 잘하시던지... 연사보다 전달력이 좋아서 계속 통역만 듣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내용도 실제로 훌륭했습니다.
3. 동시통역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외국 연사 세션은 참석률이 저조하다.
아무래도 리시버를 통해서 들어야하는 것이 수고로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종일 짧게는 20분, 길게는 한시간짜리 세션을 대여섯개씩 들었더니 정말 체력적으로 힘이 들었고 나중에는 너무 피곤해서 리시버를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아예 영어가 잘 안들리시는 분들은 동시통역을 계속 듣고 있는 것이 참 고역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사 막바지로 갈 수록 한국인 연사 세션에만 사람이 몰리고 해외 연사 세션은 자리가 많이 비어서 안타까웠습니다.
요즘은 영상 속에 있는 말 소리를 전부 스크립트로 생성해주는 AI 툴도 있고, 텍스트 번역을 수 초 만에 술술 해내는 AI 툴 또한 많이 나왔습니다.
머지 않아 국제 컨퍼런스 동시 통역사라는 직업도 점점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사의 목소리를 바로바로 스크립트로 전환하고, AI 번역기를 돌려서 무대 화면에 실시간 자막을 달아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연사가 다소 천천히 말해야할 것 같긴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세상이 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지식이 언어의 장벽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교류된다면 인류의 발전은 더욱 가속화되지 않을까요?
국제 컨퍼런스 동시 통역사는 사라져도 기업 및 정부 기관 고위급 통역사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기밀 내용을 다루는 분야의 경우 더욱 그럴 것입니다. 물론 향후 몇 십년 간은 통번역 시장이 지금과 유사하게 유지는 될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한다면 한번더 고민해보는 게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