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der Jung Dec 23. 2019

얼렁뚱땅 산티아고 순례길 16

깨달음은 언제나 뒤늦게 온다.

스물일곱번째날.





가장 먼저 기상해 짐들을 들고 복도로 나와 배낭을 꾸린다. 만약을 대비한 작은 가방을 꾸리고 큰 배낭은 숙소 앞 카페에 배송을 요청한다. 아침은 잘 안 먹지만 6시부터 배낭을 맡아준 카페에 왠지 미안해 커피와 빵을 주문한다. 배낭 배송으로 그들에게도 얼마의 이익이 떨어질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6시부터 가능하다는 것은 꽤 도움이 된다. 일찍 출발할 수 있으니까.



이제 3일 정도 배낭 없이 걸으니 발목도 약간 호전되었고 요령도 많이 늘었다. 오늘의 목표는 거리를 좀 늘려 28km이다. 전체 남은 거리는 77km인데 2일에 걷느냐 3일에 걷느냐로 고민을 많이 했다. 멀쩡한 몸이면 2일이면 가능한 거리이지만 배낭도 못 메는 비루한 몸뚱이로 일단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3일로 결정했다. 그러자 이제 어떻게 나누어 갈까? 가 또 고민이다. 인생도 순례길도 고민의 연속이다. 3일을 균등하게 나눌 수가 없다. 문제는 숙박을 위한 마을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제법 큰 마을인 아르주아(Arzua)로 결정했다. 어제를 거울삼아 인터넷으로 숙소도 예약했다. 이제 맘 편히 걷기만 하면 된다.



배낭 없이 며칠 걸으니 순례길이 새롭게 느껴졌다. 처음엔 발목에 신경 쓰느라 몰랐는데 조금 익숙해지니 주위 풍경이,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전엔 그저 하루하루 어디까지 가느냐, 얼마를 줄이느냐가 목적이었다면 이제 조금 걷는 행위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무언가 깨닫거나 느끼는 순간은 항상 끝날 즈음에 온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물론 순례길의 마지막 지역인 갈리시아 지방이 높은 산이나 언덕이 없고 길이 덜 지루한 이유도 있다.









마을에 도착하니 숙소가 오픈하기 전이다. 천천히 쉬엄쉬엄 오려고 했는데 또 실패다. 숙소 정보에 부엌 사용이 가능하다고 되어 있어 기다리는 동안 슈퍼에 다녀왔다. 6개들이 계란과 중국 라면과 스페인식 햇반을 사 왔다. 어제 못 먹은 3분 빠에야까지 해서 남은 기간 동안 먹을 식량이다.



그러나!!! 이 숙소는 조리기구를 사용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전자레인지만 사용 가능했다. 음식 재료들이 자꾸 쌓여만 간다. 거기에 계란은 혹시 깨질까 불안하기까지 하다. 내일은 무조건 조리 가능한 곳으로 가서 다 처리해야 할 듯하다. 마지막 날은 배낭을 멜 예정이어서 최대한 가볍게 해야 한다.



일단 빠에야를 데워 먹고 샤워와 빨래를 했다. 침대에 누워 전자책을 보다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아직 저녁이 되려면 멀었다. 나가서 동네를 구경하고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순례자 메뉴를 파는 식당을 찾았다. 나보다 더 부지런하신 어르신 순례객들이 벌써 두 테이블을 차지하고 와인 파티를 벌이고 있다.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오늘의 순례자 코스를 시켰다. 언제나 그렇듯 샐러드, 고기, 디저트다. 샐러드와 고기를 다 먹고 디저트를 고민하는 중에 학생처럼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온다. 디저트를 주문하려고 하는데 그의 말투가 디저트를 묻는 게 아닌 것 같다.



몇 번을 스페인어로 내게 말을 걸다가 못 알아듣자 나에게 기다리라며 다시 자리를 떴다. 그의 표정이나 말투가 친절하지 않아서 내가 뭘 잘못했나 하며 고민에 빠졌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그는 구글 번역기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고기 더 먹을래요??'



이런 친절한 친구 같으니라고~. 그 정도 내가 못 알아들으면 그냥 넘어갈 만도 한데 번역기까지 동원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더 먹을 정도로 배고프지 않았지만 그 정성이 갸륵(?) 해서 고기를 리필했다. 순례길에서의 가장 맛있고 배불렀던 저녁이었다.



새 신발을 신고 출발했는데 뒤꿈치가 헤졌다. 신고 벗을 때 자꾸 구겨 신어서 그런 것 같다. 여기에 와서 신발 구겨 신지 말아야겠다는 엉뚱한 깨달음을 얻었다.







스물여덟번째날.






마지막 40km 정도가 남았다.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이틀에 걸쳐 가기로 했다. 거리를 어떻게 나눌까? 마지막까지 고민이다. 오늘 많이 걷고 마지막을 가볍게 하기로 했다. 목적지인 산티아고를 마음 편히 가볍게 입성하기로 했다. 더구나 마지막 날은 배낭을 메고 갈 예정이기에 더욱더 그렇다. 그리고 증명서에 연연(?) 하지는 않지만 이왕 걸은 김에 완주 증명서를 받을까 하는데 소문에 사람이 어마어마하다고 했다. 이왕이면 일찍 도착해서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의 거리도 28km이다.



가방을 배송을 맡기고 숙소도 예약을 끝냈다. '오늘은 정말 마음 편히 먹고 즐기며 걸어야지!' 하고 마음먹었지만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에 나를 앞질러간 어떤 서양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작은 배낭을 멘 그 할아버지는 무척 빠른 걸음으로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빠르게 앞질러 갔다. 이 모습이 은근히 내 오기를 자극했다.



분명 그 걸음은 '나는 그냥 걸음이 원래 빨라'가 아니라  '니들 다 나한테 안돼!'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나만의 착각일듯하지만.....)



갑자기 투지가 불타올랐다. 그 할아버지 뒤에서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걸었다. 뒤를 따르며 내 마음에 확신이 들었다. 이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을 앞지르는 재미로 걷는다는 것을. 그래서 그분을 즐겁게 해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물을 마시는 틈을 타 재빨리 앞질러 나갔다. 다리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배낭까지 없으니 충분히 거리를 벌일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할아버지는 어느새 내 뒤에 바싹 붙었다. 다시 거리를 벌이며 모퉁이나 커브길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시야에서 잠깐 벗어날 때마다 나는 재빨리 뛰어 거리를 더 멀리 벌였다. 그렇게 몇 번을 하자 이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쯤 해서 힘도 들고 목도 말라 중간에 있는 바에 들어갔다. 콜라를 한잔 마시며 길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무척 빠른 속도로 바를 지나쳐갔다. 언뜻 스친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이렇게 쓰여 있는 게 보였다.



'이상하네 평소보다 더 빨리 걷는데 이놈 왜 안 보이는 거야??'








마을 근처에 거의 다 왔을 때 앞서가는 순례객의 배낭에 특이한 물건이 매달려 있는 걸 보았다. 가까이 가 보니 까만색 고무대야였다. 그동안 배낭에 매달린 수많은 물건들을 보았지만 세숫대야는 처음이다. 샤워기가 다 있는데 왜 저걸 매달고 다니는 걸까? 궁금증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 배낭을 멘 할아버지의 걸음이 너무 힘들어 보여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속도 경쟁도 하고, 이것저것 생각도 하고, 궁금한 것을 상상하다 보니 오늘도 또 일찍 도착했다. 역시 숙소는 오픈 전이다. 이곳은 마을도 작아 구경할 것도 없다. 도착해서 잠시 기다리자 내 배낭이 배달되어 왔다. 배낭을 줄 세우고 발을 말리며 오픈 시간을 기다렸다. 순위권에 들어 좋은 침대를 배정받고 1등으로 샤워를 했다.



샤워실에서 만난 순례객이 나에게 여기 왜 이렇게 사람이 많냐며 어느 길을 걸었냐고 묻는다. 프랑스길을 걸었다고 하자 자신은 북쪽 길을 걸었다고 했다. 두 길이 처음 만나는 곳이 이곳인데 지금까지 이렇게 사람 많은 건 처음 봤다고 했다. 사람이 없다는 말에 갑자기 북쪽 길이 궁금해졌다. 혹시 다음에 걷는다면????



샤워를 마치고 빨래까지 널고 자리로 오자 옆 침대 밑에 낯익은 검은 세숫대야가 보인다. 그리고 그 용도도 잠시 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그 대야에 물을 받아 족욕을 하고 계셨다. 깊은 신음과 함께. 

(나중에야 할아버지가 검정대야까지 가지고 다니며 왜 족욕을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차가운 물로 족욕을 하니 정말 다리의 피로가 확 풀렸다. 그런것도 모르고 중간에 힘들때 뜨거운 물로 족욕을 했었는데...)



오늘은 처리해야 할 음식이 많다. 계란도 6개나 있고 라면과 스페인 햇반도 2개나 있다. 일단 계란 프라이를 하고 라면에 햇반 1개와 계란 2개를 넣었다. 그래도 저녁에 또 그만큼이 기다리고 있다. 두 끼를 똑같은 메뉴로 먹었다. 그동안의 강제 단백질 다이어트가 막판에 무너진다. 그래도 마음은 날아갈 듯 가볍다.



드디어 내일이면 도착이다!!!!



** 북쪽길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여러 길 중 하나이다. 프랑스길(800km) 보다 길고 훠얼씬 험하다고 한다.



검정 대야




스페인산 수박맛바



매거진의 이전글 얼렁뚱땅 산티아고 순례길 1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