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der Jung Mar 08. 2022

퇴사의 변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간만에 늦잠 자는 토요일 아침.


아파트 계단을 다니며 세탁물을 걷는 세탁소 아저씨의 소리에 잠이 깨어 버렸다.

아저씨 목소리가 참 크구나 하고 생각하며 누워 있는데,

불현듯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벌떡 일어났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41층 건물의 11층이다.

건물이 높다 보니 8개 층씩 엘리베이터를 나누어 놓아서 자기가 속한 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정해져 있다.

거기에 화물 운반을 위해 모든 층을 다니는 엘리베이터가 2대 있고,

또 VIP 및 장애인을 위해서 모든 층에 서는 엘리베이터가 별도로 1대 있다.

건물의 엘리베이터에 대해 설명을 하는 이유는 이 엘리베이터 덕분에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이 건물에서 일을 한건 10년 전이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그 사건은 직장 생활에 지루함을 느끼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5년 전쯤이었다.


급한 회의가 있는데 늦을듯하여 급하게 지하 4층에 차를 주차하고 장애인 엘리베이터를 통해 한 번에 11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 바로 전에 위로 올라가 버렸다.

보통은 1층 로비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탄 후 다시 11층에 가는 걸로 갈아타는데 이날은 시간이 촉박했다.

장애인 엘리베이터 타는 곳을 나와 화물 엘리베이터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마침 2대 중 한 대가 출발하려고 문이 닫히고 있었다.

버튼을 눌러 닫히는 문을 다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사람은 없었다.

화물용 엘리베이터는 용도 때문에 문이 아주 천천히 닫히게 되어 있는데 그 시간마저 너무 아까웠다.

혹시나 하는 급한 마음에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빠르게 마구 눌렀다.

아마도 다섯 번쯤 눌렀을까?


갑자기 엘리베이터의 문이 빠른 속도로 닫히더니 전등이 2번 깜빡였다.

그러고는 층수와 방향이 표시되는 엘리베이터의 화면에 아래로 내려가는 표시가 나타났다.


'이 건물은 지하 4층까지만 있는데 왜 아래로 가는 표시가 나타났지? 내가 버튼을 너무 눌러서 고장 났나?'

라고 생각을 하는 도중 엘리베이터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B5라고 지하 5층을 나타내는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나더니 문이 열렸다.


순간 회의 시간 급한 건 까맣게 잊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엘리베이터를 내리니 앞에 작은 문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리니 문이 열렸다.


그곳은 몇 평 안돼 보이는 작은 공간이었다.

가운데 책상이 하나 있고 그 뒤로 작은 철제 캐비닛이 모서리 부분이 약간 찌그러진 채 놓여 있었다.

책상에는 살짝 낯익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건물의 1층 화물 엘리베이터 공간에서 일하시는 구두 미화원 아저씨였다.

가끔 내 구두도 맡겼었기 때문에 안면이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여기 이런 공간이 있었네요'

라고 말하고 나오려던 순간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캐비닛이 자동으로 한쪽으로 밀리며 또 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그렇게 나는 우연한 기회에 스파이가 되었다.

현재 스파이 총책임자는 구두 미화원 아저씨였다.

사실 지금 구두 미화원 아저씨는 3년 전부터 일을 시작했고 내가 처음에 이 건물에 왔을 때는 다른 사람이었다.

전에는 그 아저씨가 스파이 책임자였는데 다른 첩보기관에 발각되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자신들이 점찍은 사람만을 스파이로 키우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사람은 나뿐이라며,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스파이의 세계로 들어간 지 5년 동안 아직까지 어떠한 임무도 전달받지 못했다.

그저 스파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지 않도록 절대 평범하게 살라는 지시를 받았다.

1층의 많은 식당들 중에서 가장 라면을 잘 끓여주던 매점 옆의 아주 작은 분식집의 주인도 스파이였는데,

평범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라면을 너무 맛있게 끓이는 게 소문이 나서 결국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전해주며,

너무 튀지도 말고 너무 뒤처지지도 말고 오로지 '절대 평범'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남들보다 빨리 진급하면 스파이임을 눈치채게 될까 봐 억지로 일의 성과를 조절하여 남들과 같이 같은 시기에 진급을 했다.

그리고 혹시 평생(?) 안 하던 연애라도 시작하면 또 누군가 눈치채게 될까 봐 매달리는 여자들을 다 떼어 냈다.

덕분에 '스파이 협회'가 수여하는 '올해의 가장 평범상'을 두 번이나 수상할 만큼 열심히 평범하게 살아왔다.


내가 집을 서울에서 높은 곳으로는 둘째가면 서러워할 봉천동 언덕 꼭대기로 이사하게 된 것도 사실 스파이 사무실의 지침 때문이었다.

높은 곳에서 항상 주위의 변화를 살피라는 긴밀한 지시를 받고 동네를 물색해 이사를 한 것이었다.

이사하고 스파이 집들이를 하던 날 스파이 협회 서울 지부장인 구두 미화원 아저씨가 집에 가기 전에 나에게 쪽지를 건네며 지령을 하달했다.


" 이 쪽지는 잘 간직하고 있다가 어느 날 세탁소 아저씨의 '세에~탁' 소리에서 '세'자와 '탁'자 사이에 '에'가 다섯 번 들어가면 그때 열어봐. '세에~에~에~에~에~탁' 이렇게 말이야 "


사실 그 이후에 긴장해서 두어 달 정도는 세탁소 아저씨를 매일 기다렸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아저씨는 '세에~탁~'이라며 '에'자를 한 번만 발음하며 세탁물을 걷으러 다니기에 그 이후에는 관심이 살짝 떨어졌었다.




그리고 드디어 몇 년이 지난 지금 오늘 드디어 내 늦잠의 달콤함을 몰아내며 '세탁'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아저씨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중간에 '에'자를 세어보기 시작했다.


" 세에~에~에~에~에~탁 "


정확히 다섯 번이었다.

다른 층으로 가면서 멀어지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세어봐도 다섯 번이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허겁지겁 일어나 옷장 깊숙이 넣어놨던 쪽지를 찾았다.


" 이 쪽지를 열어 본 후 일주일 안에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스파이 본부로 집합할 것 "




드디어 이제는 정말 스파이의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임무는 무척 위험스럽고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운 일이지만 스파이라면 다 감내해야겠지요.

다음 소식은 호주 사막의 한가운데인 울루루가 될지, 페루의 마추픽추가 될지, 쿠바의 하바나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스파이의 기본 각국의 화폐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를 보면 이 사직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디에서 오셨어요? - 강릉, 공항, 제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