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피곤함, 추위, 쥐떼 그러나 행복했던 16시간
햇살이 뜨거웠던 7월 14일 오후, 파리행 기차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려고 기다리는데, 한 아이가 휴지로 코를 막고 있었고 아이의 엄마는 주변 사람에게 휴지를 구하고 있었다. 얼른 여행용 휴지를 아이 엄마에게 건넸다. 코피 흘리는 아이에게 작은 도움을 주며 수많은 이가 피를 흘렸던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인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점령과 민중봉기를 기리는 혁명기념일 행사에 가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파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선 한 아이는 무엇이 불만인지 끊임없이 울었고 그 울음이 그칠 때쯤 파리에 도착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파리 리옹역을 빠져나와 지하철을 타고 마들렌 역으로 갔다. 마들렌 역까지 타고 간 지하철은 매우 깨끗하고 현대적이었다. 하지만 우릴 에꼴 밀리테르(Ecole militaire)로 실어 나를 낡은 지하철이 정차하면서 파리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이미 지하철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하지만 가방을 몸에 밀착하고 가방 지퍼 위에 손을 올린 채 인파 사이로 몸을 집어넣었다. 미친 듯이 달리는 파리 지하철 안에선 승객 모두는 타인을 든든히 지지해 주는 기둥이 되었다. 파편화된 공동체를 비난하며 파리시가 기획한 대형 현대 예술에 동원된 듯했다. 한 남자 승객의 가슴근육이 느껴질 정도로 승객 모두가 하나의 덩어리였다. 다음에 파리 올 때 이왕이면 근육을 기르고 파리 지하철을 타고 싶다는 망상을 하니 어느새 에꼴 밀리테르에 도착했다.
루이 15세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군사 고등교육기관이 있는 에꼴 밀리테르 역에서 내려 그 옆에 위치한 마르스 광장(Champ de Mars)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다. 관리자들은 방문객을 성별로 가른 채 짐 검사와 몸수색을 진행했다. 몸수색 때문에 당연한 절차지만, 성별로 사람을 구분하는 걸 프랑스 사회에서 겪으니 어색했다. 기숙사, 수영장 샤워실도 같이 쓰고 심지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여자 화장실 줄이 너무 길면 가끔 여성분들이 «여자 화장실 줄이 너무 긴데, 얼른 버스로 돌아가야 돼서요.» 소리치며 남자 화장실을 사용하기도 한다. 광장과 가까워지자, 건물 사이로 치는 모래 폭풍과 그 너머에 있는 에펠탑을 보았다.
파리의 가장 큰 녹지 중 하나인 마르스 광장은 인파로 가득했다. 직감적으로 ‘중간에 화장실 어떻게 가지?’ 걱정이 들었지만, 그건 미래의 급한 내가 해결한 문제였다. 지금 더 긴급한 문제는 몇 시간 전부터 자리 잡고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을 찾는 일이었다. 사하라 사막에서 바늘 찾는 심정으로 사람들을 넘어 다니며 광장을 빼곡히 채운 인파를 주의 깊게 보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신호는 가지 않았고 당연히 인터넷도 되지 않았다. 한참을 돌았을까 인파에서 한 무리가 일어났고 우릴 불렀다. 외침이 들린 곳으로 다시 사람들을 피하고 넘어 일행과 만날 수 있었다. 이제 4시간만 기다리면 11시부터 혁명기념일을 장식할 에펠탑을 배경으로 한 불꽃놀이를 볼 수 있었다. 뜨거운 햇볕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점점 피가 끓어올랐고 금세 지쳤다. 9시가 넘어서야 우리 머리 위에도 그늘이 생기기 시작했다. 진이 빠진 채 다양한 음악 공연을 들으며 얼른 해가 지고 불꽃놀이가 시작되길 바랐다. 음악 공연이 끝날 때마다 에펠탑은 불빛으로 반짝였고 에디트 피아프의 라 비앙 로즈가 끝나고 에펠탑이 반짝일 때는 드디어 날이 시원해졌다.
10시 30분까지 완전히 깜깜하지 않았던 하늘에 짙은 어둠이 깔리자 11시에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에펠탑은 프랑스 국기의 색을 띠기도 하고 다양한 빛으로 물들었고 폭죽도 음악에 맞춰 매우 우아하고 화려하게 폭발했다. 프랑스의 해외영토와 카리브해 크레올리테(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령 안틸레스 제도에서 일어난 고유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문학 운동)가 주제였다. 주제가 프랑스와 지리적, 문화적 거리가 있는 장소와 관련이 있는 만큼 폭죽의 색깔도 다채로웠고 라틴의 문화가 짙게 밴 듯한 음악도 많이 들렸다. 불꽃놀이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핸드폰의 용량이 가득 차 그 모습을 눈으로 담을 수밖에 없었다. 이 불꽃놀이는 태어나서 본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불꽃놀이로 등극했다. 프랑스가 왜 예술의 나라라고 불리는지 불꽃놀이가 이어진 20분 동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느린 행정 처리 따위는 잊은 채 이런 행사를 주최할 수 있는 문화, 예술의 역량이 있는 나라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로 순수한 행복감을 느꼈다. 또한 프랑스의 식민 지배 역사와 긴밀하게 연관된 주제를 고른 이유를 자국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고, 프랑스의 영토지만 정서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해외 영토 주민들과 본토의 국민통합을 이끌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름다운 예술을 관람한 뒤에는 삶의 고통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불꽃놀이는 자정에 끝났지만,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기에 기차가 출발하기 전까지 어딘가에서 9시간을 때워야 했다. 마르스 광장 근처에서 음료를 구입하고 긴 공중화장실 줄을 서니 1시간이 지나갔다. 발길을 옮겨 알렉상드르 3세 다리와 앵발리드 사이에 있는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다. 새벽이었지만, 공휴일이어서 그런지 공원엔 사람이 많았다. 치안은 나쁘지 않았지만, 문제는 추위였다. 7월이지만, 밤엔 20도 이하로 떨어졌고 바람은 체감온도를 더욱 떨어뜨렸다. 친구들과 바짝 붙어 앉았고 최대한 맨살이 바람에 닿지 않게 돗자리를 다리에 덮었다. 결국 한 명씩 지쳐 눕기 시작했는데 하늘에 별이 많이 보여 춥지만,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 2시간을 버티고 새벽 3시 파리 리옹역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센 강변을 따라 쭉 직진해 기차역이 갈 예정이었다. 콩코르드 광장과 튈르리 정원을 지나고 있을 때 길 위에 수많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덤불 속과 길 위에 빠르게 움직이는 한 무리를 보고 자전거도로로 발길을 옮겼다. 파리 인구보다 3배가 많은 파리 쥐 떼를 피해 걷다 보니 커다란 시계가 달린 오르세 미술관이 나왔고 센강에 번져있는 주황 불빛들이 보며 파리의 밤거리를 걸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중간중간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쉬었는데 그 시간은 3분을 넘지 않았다. 너무 오래 앉아있으면 졸음이 쏟아졌기에 계속 걸어야 했다. 굳게 닫힌 루브르 박물관을 지나고 퐁뇌프 다리를 비롯한 파리를 잇는 수많은 다리를 스쳐갔다. 시청을 지나 저 멀리 바스티유 광장이 보이자, 파리 밤산책이 거의 끝나간다는 희망이 생겼다. 공원을 출발한 지 한 1시간 반이 되었을까, 커다란 시계탑이 있는 리옹역에 도착했다.
새벽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따뜻한 역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자꾸 정신을 잃었다. 핸드폰을 도난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그 가방을 베개 삼아 엎드려 잠을 잤다. 잠들고 주변을 살피기를 반복하자 동이 텄고 몸은 화장실을 보내 달라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역 내 유료 화장실에 가자,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점점 위험수위에 다다르고 있다는 직감이 들어 필사적으로 역 안에 다른 화장실을 찾았다. 카페에서 화장실을 갈 심산으로 크로와상 하나를 사고 직원에게 물어보니 카페 안에 화장실이 없다고 했다. 리옹역에 단 하나뿐인 화장실이 잠긴 것이다. 팽창한 방광이 장을 눌렀는지 배도 아파지기 시작했고, 구글맵을 켜서 공중화장실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화장실이 있었다. 가능한 가장 빠른 걸음으로 간 그곳엔 이미 대기자가 있었다. 프랑스 공중화장실은 앞사람이 화장실을 사용하면 화장실이 자동으로 청소될 때까지 적어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그곳에서 4분 거리에 있는 화장실에 가는 도박을 하기로 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도착한 하프 가게 앞에 있는 공중화장실엔 다행히 사람이 없었고 간신히 인간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다. 지옥 같은 시간이 끝나고 이제 곧 있으면 기차를 타고 집에 간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기차는 1시간이 연착되었고 피로와 짜증에 찌든 채로 기차를 기다렸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10시간을 기다려서 탄 기차에서 기절한 듯 잠을 잤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파리에서 불꽃놀이를 보러 간 후회는 절대 들지 않는다. 피곤하고 힘들지만,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혁명기념일 맞이 파리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