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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Aug 06. 2023

계속 흐르고 움직여야 해, 낭트

 어디 가고 싶다는 감정은 왜 들까? 미지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으로 집을 떠나기도 하고, 이미 많은 시간을 보낸 공간이 주는 익숙함을 쫓아 여행을 가기도 한다. 낭트행 기차표를 예매한 이유는 전적으로 전자에 해당하는데,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브르타뉴 지방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부니까 좀 춥지 않을까.’’낭트 칙령 들어봤는데, 진짜 낭트에서 일어난 일일까?’ 낭트의 기온은 여행 당일이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21도였다. 이 사실을 안 이상 가방에 경량 패딩을 넣지 않을 수 없었다. 낭트 칙령에 관한 의문은 여행하며 풀기로 하고 잠들었다. 새벽 6시 5분에 출발한 기차는 5시간을 달렸는데, 파리를 관통하자 비가 내렸고 투르를 지나자,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계속 흐렸다. 고개를 푹 숙인 해바라기밭을 몇 개 지나고 나서야 맑아진 낭트에 도착했다.



 낭트에 도착했을 때,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하지만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불어 닥치는 강풍으로 이 고민은 날아갔고, 바람의 저항을 거슬러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게 관건이었다. 탐험하는 기분으로 길 사이로 보이는 교회 첨탑을 따라가며 새로운 도시를 눈에 담았다. 그렇게 도착한 성당은 생 클레망 성당(Eglise Saint-Clément)이었다. 19세기에 지어진 이 성당은 당시 낭트에서 건축된 다른 종교 건축물과 같이 신고딕 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19세기는 고딕 양식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빅토르 위고의 영향으로 대중이 고딕 양식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였다. 또한 계몽주의 시대에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에 대항하는 건축 양식으로 왕정 등 보수적인 사회 가치를 추구했다고 한다. 높은 층고와 천장까지 흰 차분한 분위기를 품은 성당엔 오르가니스트가 연습하고 있었다. 오르간 연주자를 제외하면 혼자인 성당 안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관광지를 연결해 놓은 초록 선을 따라 낭트 대성당으로 갔다.



초록 선을 따라 대성당을 가기 위해 커다란 돌문을 지나갔다. 지금은 굳이 이 문을 굳이 지나지 않아도 대성당을 비롯한 다른 장소를 가는데 문제가 되지 않지만, 3세기에 바바리안족의 이주와 로마의 행정, 군사 개혁으로 도시에 성을 쌓은 이후엔 성곽 마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꼭 거쳐야 했다. 갈로로마 시대에 낭트와 앙제를 잇던 길과 만나는 이 문은 로마 시대의 성벽을 기초로 하여 15세기에서 16세기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598년 낭트 칙령을 조인하기 위해 파리에서 행차한 앙리 4세도 이 문을 지나갔다고 한다. 여행 당시엔 앙리 4세가 이 문을 지나쳤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낭트를 둘러싸고 있던 성의 마지막 남은 성문을 지나갔다.


낭트로 들어가기 위해 지나야 했던 성문


성문을 지나자 곧장 생피에르와 생폴 대성당(Cathédrale Saint Pierre et Saint Paul) 정면을 볼 수 있었다. 육중하고 거대한 대성당 내부는 어떨지 잔뜩 기대했지만, 곧장 고개를 갸웃했다. 물건을 들이는 듯한 중앙 문을 제외한 다른 문들이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성당 문에 다가가자 주인이 동물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큰 똥이 있었고 보수공사 중이어서 개인이 성당을 들어갈 수 없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1434년에 짓기 시작해 1893년에 완공된 프랑스에서 건축 기간이 가장 긴 성당 중에 하나인 이 대성당은 2020년 7월에 일어난 화재로 복원 공사 중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초록 선을 따라갔다.

복원 공사로 들어가지 못했던 낭트 대성당


 간단히 케밥을 먹고 낭트 여행을 하면서 가장 기대한 부르타뉴 공작 성(Château des ducs de Bretagne)을 찾아갔다. 해자 주변엔 다양한 식물이 심겨 있었다. 지금은 평화롭지만, 역사 속에서 이 길에서 벌어졌을 급박한 일들을 상상하며 돌로 축조한 다리를 건너 공작성을 입성했다. 성의 많은 부분이 보수 공사 중이었다. 하지만 대포를 보관했던 건물, 왕이 기거했던 건물의 외관은 구경할 수 있었다. 부르타뉴의 공작이 낭트 주교들의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이곳에 갈로로마 시대의 성벽을 기초한 성이 1207년에 세워졌다. 14세기 후반엔 장 4세는 다각형 화강암 탑을 쌓았고, 몇백 년이 지난 후, 부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는 낭트의 위상에 걸맞은 성을 짓기 위해 전면적인 재건을 실시한다. 이렇게 재건된 성은 공작이 거처하는 궁전의 역할과 프랑스 왕권에 저항할 수 있는 요새로 기능했다. 프랑스 왕이 부르타뉴 지방을 자신의 세력하에 둔 뒤에는 왕의 부르타뉴 지방의 주요 거처가 되었고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낭트에 프랑스 왕의 권위를 보여주는 수단이 되었다. 종교전쟁 시기에 낭트는 가톨릭 편에서 전쟁을 치렀는데 이 성은 개신교 세력의 공격에서 마을을 잘 지켜주었다. 이후, 리슐리외 추기경 시대엔 감옥으로 기능했고, 화재를 입고 루이 14세 시대에 고전주의 양식으로 개조하며 모습이 다변했다고 한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품었던 낭트 칙령이 낭트에서 발포한 것인지에 관한 궁금증은 성안에 있는 화장실을 가면서 풀렸다. 벽에 붙어있는 돌판에 ‘앙리 4세가 이 마을에서 칙령에 조인했다.’라고 쓰여있던 것이다.


낭트의 대표적인 건물, 브루타뉴 공작성


 성을 나온 뒤, 낭트의 명물 코끼리를 보러 기계섬(Les Machines de l'Île)으로 향했다. 섬에 가기 위해선 루아르강을 지나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어두워진 날씨에 강을 건너는데 강풍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웠다. 미친 듯이 불어대는 바람이 눈에 먼지를 계속 불어넣어 눈꺼풀을 사정없이 깜박였다. 흙탕물인 강을 건너자 간이 여행안내소가 나왔다. 지도를 하나 받는데 바람이 너무 불어 직원이 지도를 제대로 건네줄 수도 없었다. 지도를 가까스로 받아 지도를 보려고 피니 바람으로 지도 한쪽이 찢어졌다. 지도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 핸드폰을 보고 기계섬을 찾아갔다. 강풍을 뚫고 도착한 기계섬엔 기계 코끼리가 있었다. 앞에서 기다린 지 5분도 안 돼서 코끼리는 유연한 코 관절을 자랑하며 물을 쏴대기 시작했고, 다리와 귀도 움직였다. 큰 감흥은 없었다. 코끼리가 한 관객의 무덤덤한 감정을 느꼈는지 자리를 뜨기 무섭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바람이 덜 부는 곳에 앉아 다음 방문지를 물색했다. 근처에 노예제 폐지 기념관이 있어 가보기로 했다.


기계섬에 가면 볼 수 있는 기계 코끼리


 루아르강변에 위치한 기념관에 근처에 다다르자, 낭트가 노예무역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었다.. 15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유럽발 노예무역 항해가 27233회 이상 있었는데, 이 중 프랑스가 차지하는 횟수는 4220회 이상이었다. 프랑스 출항 중 1800회 이상은 낭트 항구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었다. 기념관 근처 바닥에 적혀있는 낭트에서 출발한 노예선 이름과 배가 기항했던 항구 이름을 지나고 계단을 내려가 기념관에 도착했다. 강과 가까워지며 물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노예선에서 노예로 잡힌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가 전이되는 듯했다. 기념관엔 노예제 폐지의 역사, 사회적 약자들의 외침과 평등을 위한 제도적인 노력이 적혀있었다. 지금도 사실상 생각보다 많은 인류가 노예 상태에 놓여있고 1990년대에 와서야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한 나라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노예무역에 관심이 생기고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착취들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좋은 곳이었다. 기념관을 나오며 자신들의 과오를 드러내고 반성하는 낭트의 행보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낭트 노예제 폐지 기념관


 기념관을 나와 낭트 시내를 걸으며 도시 곳곳에 설치된 예술품들을 관람했다. 그러다 생트 크화 성당(église Sainte Croix)에 잠시 들어와 앉아있었다. 성당 내부는 작고 포근했다. 평소 같았으면 성당 건물을 집중해서 보는데, 그 순간엔 성당에 잠시 머물거나 기도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품고 있는 따뜻함이 성당 건축물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종교 세력인 개신교를 향한 박해를 잠시나마 막은 낭트 칙령과 자신들이 저지른 노예무역의 과오를 뉘우치는 낭트를 거센 바람을 맞으며 여행하니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과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버린 낭트를 여행하면서 말이다. 맑은 웅덩이보다 루아르강처럼 흐르는 흙탕물처럼 살기를 소망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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