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궁금해진다. 필리핀에서 우연히 스페인어 R 발음은 들은 뒤, 그 언어의 매력에 푹 빠져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궁금해졌다. 그 뒤로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운명은 스페인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향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혀를 굴리는 R 발음이 아니라 가래 끓는 R 발음을 하며 프랑스에서 지내고 있지만 여전히 스페인은 나를 당기고 있었다. 스페인이 당기는 중력에 따라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바르셀로나로 빨려 들어갔다. 버스를 탄 지 7시간이 되었을까 어둠 속에 실루엣만 보이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바라보며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뒤, 커피를 마시며 장시간 이동으로 멍해진 정신을 깨우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으로 갔다. 가우디 건축의 정수인 이 성당을 오래전부터 보고 싶어서 덥고 습한 날씨를 뚫고 40분 정도 걸어갔다. 엄청난 규모의 성당을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도시의 건물들이 높고 나무가 울창해서 그런지 쉽사리 성당을 볼 수 없었다. 그늘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관광객 무리를 따라가자 어느새 수많은 인파가 나타났고 그 앞에 웅장한 성당이 있었다. 카탈루냐 모더니즘이라는 처음 보는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내 눈엔 성당으로 보이진 않았다. 새로움이 주는 이질감이 가득한 건물은 종교 건축물이라기보다 놀이공원에 지어진 화려한 성 같아 보였다. 첨탑 위에 놓인 독특한 흰색 장식물들은 더욱 성당을 현실과 동떨어진 동화 속에 나올 법한 건축물로 보이게 했다. 얼른 성당에 들어가 스테인드글라스를 감상하고 싶었다. 성당 안을 거닐면 숲을 거니는 느낌이 든다는데 한껏 기대하고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서 카메라로 큐알코드를 인식하니 성가정성당 입장표를 예약하기 위한 어플을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어플을 깔고 예약을 진행하려고 하니 며칠간 성당 입장 예약은 가득 차 있었다. 바르셀로나까지 왔는데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내부를 못 보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딕 지구로 발을 돌려 13세기에 짓기 시작한 고딕양식의 바르셀로나 대성당으로 향했다. 대성당은 학생에게도 돈을 받았는데 거의 모든 문화재 입장이 학생에겐 무료인 프랑스가 얼마나 학생을 배려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방문하지 못한 헛헛함을 바르셀로나는 끊임없이 입에 집어넣을 무언갈 제공하며 만족감을 선사했다. 식당은 덥고 습한 바르셀로나 날씨를 피하기 위한 가장 매력적인 장소였다. 식당에 들어가면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시원하고 달달한 샹그리아를 마시면 행복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산물이 잔뜩 들어간 빠에야, 구운 감자에 다양한 소스를 뿌려 먹는 파타타스 브라바스, 꿀대구, 오징어와 생선 튀김, 샐러드 등 다양한 음식을 원하는 만큼 먹으면 샹그리아의 효과로 잠이 솔솔 온다. 식사를 마치면 자연스럽게 숙소에 가서 잠을 자며 다시 움직일 힘을 충전했다. 이렇게 밥을 몇 번 먹다 보면 무슨 9시에 저녁을 먹냐며 투덜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시에스타를 즐기고 스페인 사람들과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이렇게 먹었다면 재정난으로 짐 싸서 집에 가야 하겠지만, 다행히 상대적으로 저렴한 레스토랑 물가로 오랜만에 외식을 많이 했다.
아침으로 추로스를 초콜릿에 잔뜩 찍어 먹은 뒤, 길가에 있는 과일가게를 발견했다. 진열된 잘 익은 납작 복숭아를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었다. 심혈을 기울여 복숭아 5개를 고르고 무게를 재고 계산을 했는데, 2유로가 채 안 되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물자 과육을 부드럽게 잘라졌고 달콤한 과즙이 뚝뚝 흘러내렸다. 예약해야 하는 관광지도 많고 프랑스와는 다르게 학생에게도 많은 입장료를 요구해서 바르셀로나 여행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과일의 맛과 가격은 바르셀로나 시정부의 방침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많은 관광객이 몰려오면 예약을 필수지!’라고 생각하고, 또 입장료 낸 만큼 과일 많이 사 먹으면 이득이라고 합리화하면서 과즙 많은 복숭아를 순식간에 모두 먹어 치워 버렸다. 복숭아가 잘 소화되길 바라며 저녁을 먹기 위해 시에스타 모드로 들어갔다.
먹고 자고 또 소화할 겸 돌아다니는 여행을 반복하자 어느새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최저가로 교통편을 마련하다 보니 우선 스페인-프랑스 국경은 버스로 넘어야 했다. 프랑스로 넘어가 기차로 갈아타고 집에 갈 계획이었다. 버스 하차와 기차 탑승 사이의 시간은 1시간 남짓이었다. 하지만 길이 너무 막혀 기차 출발 15분 전에 버스에서 내렸고, 기차역까지 가는데 15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기차를 놓칠까 봐 걱정하며 극도의 긴장 상태로 기차역을 향하고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기차가 10분 연착된 것이다. 기차역 플랫폼에 도착하자 곧바로 기차가 도착했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든든히 채운 배는 바르셀로나에서 침투한 코로나바이러스로 홀쭉해졌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묻어온 바이러스와 싸우며 그곳에서 얻은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비로소 나는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