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하는 여행은 대부분 즉흥적으로 이루어진다. 파리의 몇몇 박물관을 제외하곤 꼭 가야 한다는 의무감은 들지 않는다. 이번에도 침대에 누워 프랑스 지도를 띄워 놓고 자유롭게 여행지를 골라보았다. 지도를 확대해 보고 축소하기도 하고, 동서남북으로 이리저리 살피다가, 더워지는 날씨를 피해 북부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파리보다 북쪽에 있는 도시들의 이름을 쭉 훑어보다가 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노르망디 지역의 서늘한 날씨를 만끽하며 도시를 거니는 상상을 하며 TGV를 타고 루앙으로 향했다. 편도 4시간 걸려 도착해 루앙을 여행할 수 있는 3시간뿐이었다. 이 시간 동안 충분히 여행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새로운 도시에 잠시라도 머무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미리 챙겨간 빵오쇼콜라로 점심을 때우고 잠자며 시간을 보내자 어느새 바이킹의 땅, 노르망디에 자리한 루앙에 도착했다.
기차역 밖 루앙 상상 속의 도시와는 달랐다. 선선한 날씨는커녕 작렬하는 햇볕을 피해 당장 선글라스를 써야 했고 그늘 속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몇 걸음 걷자, 골목에 우뚝 서 있는 커다란 성 탑이 보였다. 높이가 35미터이고 벽의 두께는 4미터가 넘는 이 육중한 원형 탑은 12세기에 프랑스 왕 필립 오귀스트의 명령으로 지어진 루앙 성의 일부였다. 평온해 보이기만 하는 루앙이 백년전쟁과 종교전쟁을 치르면서 겪었을 격동을 상상하며 조용한 골목을 지나며 도시 안으로 점점 들어갔다.
루앙은 인적 드문 골목을 지날 때조차 목조 골조를 들어낸 전통가옥(maisons à colombages)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현재 이러한 전통 가옥이 루앙에 2000채가 남아있다고 한다. 또한 중세 시대에 지어진 가옥이 200채가 보존되고 있었다. 나무 골조의 질감이 어떨지 궁금해서 손으로 한번 만져보았다. 거칠거칠해서 조금 세게 문지르면 가시가 박힐 것 같았다. 벽돌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집들 사이에 놓여있는 전통 가옥들은 알록달록한 색깔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중세 시대의 루앙은 섬유산업과 항구로 프랑스 왕국의 두 번째 도시로 융성한 곳이었다고 한다. 도시의 인구가 점점 늘어나면서 루앙을 둘러싸고 있는 숲에서 목재를 구해 목재 골조가 드러난 집을 지었다고 한다. 노르망디의 이러한 건축양식은 영국 남부 지역의 방식과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는데, 이 사실은 바이킹과 그들의 후손이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다스리던 시기를 떠올리게 했다.
햇볕을 맞고 피하기를 반복하며 걷자, 시청 앞에 놓인 나폴레옹 기마상에 다다랐다. 바로 옆엔 거대한 건물이 있었는데 규모를 보아 대성당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성당의 전면은 보수공사 중이어서 전부 가려져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 유명한 루앙 대성당을 못 들어가나 좌절하며 구글 지도를 켰다. 이제 어딜 가야 하나 지도를 들여다보니 다행히 루앙 노트르담 대성당은 근처 다른 곳에 있었다. 실망감은 희망으로 바뀌었고 대성당에 금방 도착했다. 화려하고 거대한 성당의 서쪽 파사드를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았다. 넓이가 61미터에 달하는 파사드엔 70개의 인물 조각상이 놓여있었고, 양옆엔 서로 모양과 높이가 다른 생 로망(Saint-Romain) 탑과 버터탑(tour de Beurre)이 서 있었다. 생 로망 탑엔 프랑스에서 가장 무거운 종이 달려 있다는 점도 신기하지만, 버터탑의 이름이 왜 이렇게 지어졌는지 더 궁금했다. 이 탑의 이름을 설명하는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설은 성당은 전체적으로 흰색 돌로 지어졌는데, 이 탑은 당시 버터와 비슷한 노르스름한 색을 띠는 돌로 건축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 탑 지을 돈을 모금하기 위해 헌금을 내면 금식과 금육을 해야 하는 시기에 버터를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주면서 지금의 이름이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성당에 들어가려고 이 비대칭인 파사드에 점점 다가가자, 웅장함 속에 가려져 있던 섬세함과 화려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 내부에도 수많은 성인상과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다. 대성당에 들어가자마자 2명의 무덤을 찾아다녔다. 바이킹족의 수장이자 서프랑크 왕 샤를 3세에게 노르망디 지방의 일부를 영지로 받고 911년에 루앙의 백작 작위를 받은 롤로의 무덤과 십자군에 참여한 노르망디의 공작이자 잉글랜드의 왕, 사자왕 리처드의 심장이 안치된 곳이 있기 때문이다. 성당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무덤 하나를 찾았다. 하지만 관 위에 설명이 라틴어로 적혀있어서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쉬움을 남긴 채 다시 광장으로 나와 루앙 대성당을 프랑스에서 가장 높고, 세계에서 4번째로 높은 성당으로 만든 151미터의 첨탑을 구경하고 발길을 돌렸다.
점점 많아지는 관광객들의 무리를 따라가다가 저 멀리 루앙 대시계(Le Gros-Horloge)가 보였다. 고딕 종탑과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아치형 건물에 걸려있는 황금색 시계가 밝은 햇볕을 받자 다른 시대로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을 주었다. 1389년에 만들어진 시계는 달의 위상과 요일도 알려준다고 한다. 그리고 시곗바늘엔 13세기부터 루앙의 상징인 양이 붙어있어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곳은 시계뿐만 자체만이 아니라 이름도 불문과인 나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시계(horloge)는 여성형인데 대시계(le gros-Horloge)는 남성형으로 쓰인 것이다. 이는 시계가 만들어질 때만 해도 남성형이었던 단어가 16세기에 이르자 여성형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언어 습관은 쉽게 변할 리 없었고 루앙 사람들은 계속 중세의 문법을 유지한 것이다. 결국 이 시계의 정식이름은 19세기말 남성형으로 남게 된다고 한다. 아름다운 중세의 시계와 그 밑을 지나가는 꼬마 기차가 내뿜는 명소의 분위기를 만끽하며 또다시 루앙의 골목길을 걸어 한 광장을 향했다.
비유 마르쉐 광장(Place du Vieux-Marché)에 도착했다. 광장 주변엔 많은 전통가옥이 있었고 그중 한 집에는 다른 나라 국기들과 함께 태극기도 걸려있었다. 광장 가운데엔 독특한 스타일의 성 잔다르크 성당이 있었다. 성당 내부는 부르봉 왕가를 상징하는 백합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성인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천장은 나무로 지어졌는데 바이킹의 배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성당에 앉아 더위를 시키고 밖으로 나가 잔다르크가 화형 당한 장소를 찾아보았다. 표시판이 잘 안 보여 풀숲으로 다가갔는데 풀숲 안에서 쥐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 더 이상 가까이 가진 못했다. 멀리서 그 자리에 서 있는 십자가를 보면서 프랑스 영토에서 영국을 물리친 구국 영웅 잔다르크가 아닌 부르고뉴 군대에 포로로 잡혀 영국군에 팔린 뒤 종교재판을 받고 19살에 화형 당한 한 소녀의 고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광장에서 나와 걸어가는데 그늘에 앉아있던 분이 인사하며 한국에서 왔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악수를 청했는데 잠시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악수하고 보자르 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에 간 이유는 딱 한 가지 모네의 작품, 루앙 대성당을 보기 위해서다. 기차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을 확인하고 미술관에 들어갔다. 인상주의 작품을 보기 위해선 성인들과 예수를 그린 종교화를 지나고 정물화를 지나고 풍경화를 지나야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인상주의관이 나온다. 클로드 모네가 흐린 날에 그린 루앙 대성당을 아까 본 대성당과 비교해 보며 어디를 그렸는지 추측해 보았다. 그리고 모네의 작품인 프랑스 삼색기가 나부끼는 생-드니 거리, 1878년 6월 30일 축제를 감상했다. 가까이에서 보면 붓 터치의 연속으로 보이는 작품이 거리를 두고 보면 어떻게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아름다움을 담고 있을 수 있는지, 모호한 그림이 관람자에게 현장에 있는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궁금했다. 전시 구경을 마치고 더운 날씨를 피해 조용하고 그늘 많은 길을 따라 기차역으로 향했다. 정시에 도착한 기차를 타고 가며 왕복 8시간을 이동해 3시간 여행한 알찬 루앙 여행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