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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Jan 20. 2024

무언의 대결

차라리 그를 뛰어넘기로 하였다.

  데뷔전격인 회의가 다음 주 초로 다가오면서 마음이 바빠졌다. 지난달 순 새로 부임한 단지에서 맞이하는 입주자대표회의다. 그런데 50대 초반인 비교적 젊은 회장이 하두 푸시하고 쪼는 성격이어서 맞춰주기가 약간 힘들다. 다소 느긋하게 일정을 잡고 진행하되 늦지 않게 마무리하는 나의 스타일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서 생기는 스트레스다. 솔직히 짜증이 나지만, 워낙 개성이 강한 사람이라서 그냥 맞춰주기로 하였다. 


  그가 바라는 대로 오늘도 주요 업무의 요지를 카톡으로 전송해 주었다. 아직 습관화가 되지 않아서 깜빡 잊었다가 화들짝 놀라 서둘렀다. 하던 일을 멈추고 검지손가락으로 부리나케 메모를 하였다. 시계를 쳐다보니 오후 6시 퇴근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일종의 약식 일일보고(daily briefing)다. 그럴 때마다 참 별난 회장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직장에 할 일도 많을 텐데 아파트 일을 이토록 꼼꼼하게 챙기다니.

 

  내가 한낱 관리소장에 불과한 존재라 하지만,  너무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불만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가 아주 막돼 먹거나 무례한 사람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해볼 만하지라고 생각을 고쳐 먹은 이유다. 정중한 예를 깎듯이 갖추면서도 나에게 주문하고 요구할 사항은 강력하고 분명하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그것도 아주 자주.

 

  그는 오로지 주민들에게 공약으로 내세웠던 일들을 하나씩 완성해 나가 데에 엄청난 들이고 있었다. 동대표 회장 하면서 그렇게까지 업적에 신경 쓰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만큼 이례적이고 특이한 케이스였다. 그가 지레 부인하지만, 마치 이번 임기가 끝나면, 시의원이나 도의원 같은 모종의 선출직 공직에 도전할 것처럼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관리소장을 그토록 손아귀에 쥐듯 할 이유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소장은 아무튼 자신이 하는 일에 적극 협조해 달라는 메시지를 무시로 던졌다. 나보고 열심히 해달라는 뜻이기도 해서 고맙게 생각한다.


  오늘 금요일대표들에게 꼭 회의자료를 배포해 달라는 날이었다. 절대 주말을 넘기면 안 된다는 그의 주문에 응하느라 하루 종일 분주하였다. 이게 혹시 나를 시험하는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었다. 더구나 내 입으로 한 약속이기도 해서 어기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의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호기로 삼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갑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기 같은 게 솟구쳐 올랐다. 젊은 시절의 패기가 되살아나는 듯하였다. '그래. 차라리 당신을 기어코 뛰어넘고 말 거야! 내년  -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만만한 시간이 아닐 테지만 - 임기가 끝나는 그날까지'. 귀찮고 힘들더라도, 또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때까지 버텨보기로 하였다. 그러고 나면 지금보다는 나은 시절이 오리라는 막연한 희망과 기대가 치솟았다. 아무래도 그와 같은 타입은 보기가 드물 테니까. 그때 가면 또 어떤 인물이 등장할지 모르는데 차~암, 꿈도 야물지...ㅋ


  오후 늦게서야 회의자료를 완성할 수 있었다. 분량이 자그마치 100쪽에 가까웠다. 햐~, 첨부자료도 많지만, 무슨 놈의 대표 회의자료가 100쪽을 헤아리다니...! 회장의 입맛을 쫓아 만들기는 했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온몸에서 진이 빠진 것 같았다. 경비반장을 통하여 동대표들에게 오늘 중 틀림없이 배포되도록 당부를 하고 바로 퇴근하였다. 기분이 후련하고 좋았다. 대표들이 회의자료를 읽어보면, 그들이 프리미엄급 서비스를 받고 있다는 생각들겠지. 스스로 프라이드가 느껴졌.


  내일이 대한(大寒)인데 기온이 많이 올라 날씨가 초봄처럼 푸근하였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더 가벼웠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어쩌면 나는 지금 젊은 회장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내가 그를 징검다리 삼아 시냇물을 건너가는 중이다. 이제 바야흐로 70이 멀지 않은 나이가 되었지만, 자의든 타의든 자기 계발의 욕구가 다시 꿈틀거렸다. 그 끝이 과연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다. 미사여구에 변명도 좋지.^^ 나이가 들어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살아나는 승부욕이라니. 회장이 비록 나보다 훨씬 젊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토록 나를 자극하는 그를 보노라면 제사람 다룰 줄을 아는 것 같. 그래, 기한이 정해져 있는 우리의 대결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 역시 젊게 사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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