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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Jun 03. 2022

서프라이즈에 실패했다고 구박하지 마세요

어설픈 것의 묘미

님편은 정말 거짓말을 못한다. 뭘 숨기는데도 재주가 없다. 그런 그가 서프라이즈에 제대로 성공한 적이 있다.


때는 2월 초, 신혼집 입주로 바빴던 때. 곳곳에 쌓인 박스를 하루에 3개 이상은 까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증명할 수 있었던 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나라 잃은 표정으로 거실에서 망연자실 숨 돌리고 있을 때 그가 박스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이거 하나만 풀고 쉬자." 원오브짐이라고 생각해서 큰 의심없이 오케이를 외쳤다. 칼로 신나게 테이프를 찢어발기고 상자 속 알맹이를 발견한 순간 내 눈은 오렌지 빛깔로 반짝였다.


어 이게 뭐지. 에르메스의 주황은 아니고 뤼비똥의 주황 같은데? 진심으로 신이 난 나는 그 자리에서 돌고래 피치로 '이게 모야? 이게 모야?'를 연신 외친 후 눈물의 브레이크 댄스를 췄다.

그는 오다가 (백화점에서) 주웠다는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같이 살게 된 기념으로 하나 선물하고 싶었어." 그 순간 옷걸이에 걸려있던 공짜 에코백들이 기립박수를 친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이겠지. 쨌든 내돈내산 해본 적 없는 고가의 가방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받아 뜨겁게 기뻤다.


그리고 내 생일 D-2였던 날. 안방에서 잔업을 하다가 법적 배우자가 뭘 하고 있나 궁금해서 침실에 갔다. 그때 붙박이장에서 어떤 상자를 꺼내고 있는 법적 배우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내가 욕쟁이인걸 들켰을 때도 그런 눈으로 날 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의 눈은 절망을 그리고 있었다. "아 들켰다...미리 생일 축하해! 이미 들켰으니까 지금 열어봐!!"


내 눈은 이번엔 민트 빛깔로 반짝였다. (재택근무 중이라) 로빈슨 크루소 같은 몰골이었던 나는 현장에서 즉흥 작곡한 티파니송을 부르며 선물 상자를 뜯었다. 그는 정말 거짓말을 못한다. 뭘 숨기는데 재주가 진짜 재주가 없다. 물론 그가 매번 서프라이즈에 성공하는 능구렁이였으면 덜 재밌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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