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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Mar 24. 2023

나와 닮은 아이와의 이별

추억 속 하숙집 메이트를 위한 추모글

2010년 나는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신입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친구들에게 메신저로만 전해 들었다. 대부분이 몰라도 그만인 이야기였는데, 딱 하나 나의 흥미를 이끄는 존재가 있었다. 신입생 중에 나를 꼭 닮은 아이가 있다고. 하필 고향도 같은 부산이라고.


복학 후 나는 누가 따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그 아이가 누군지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스페셜리티에 천착하던 시절이라, 누군가를 ‘닮았다’는 표현이 모욕으로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런 감정을 뛰어 넘을 정도로 나와 닮은 아이가 내 눈앞에 있었다.


약간 찢어진 눈에 자존심 세 보이는 광대뼈. 그에 걸맞지 않은 작은 체구와 부산 사투리 넉넉하게 섞인 말투까지. 결국 나는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나와 그 아이는 지독히도 닮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3학년 2학기때였나, 그 아이와 같은 하숙집에 살면서 부쩍 가까워진 적이 있다. 우리는 샤워한 물을 대야에 받아 양칫물로 쓰라고 잔소리하는 하숙집 할머니의 꼬장꼬장함에 함께 분노하고, 방에서 개미가 나온다고 항의하자 ‘그건 아가씨가 과자를 많이 먹어서 그래’라는 명답을 던진 할머니의 당당함에 함께 치를 떨었다. 


나는 나를 닮은 그 아이와 낡디 낡은 하숙집에서 할머니를 돌려까기 하며 타인을 해치지 않는 분노가 결속을 다져준다는 진귀한 교훈을 배웠다. 


그 아이는 나이만 나보다 어렸지 나의 인생 스승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의 나는 학교 선후배 사이에 존재하던 위계를 경계하면서도 그 속에서 순응하는 수동적인 아이였다. 즉, 불만은 있지만 뒤집을 용기는 없는 소시민이었다. 


그 아이는 달랐다. 즐거워 보였던 동아리가 똥군기 양성소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동아리를 떠났고, 자기와 마음 맞는 친구들과 자유로이 대학 생활을 보냈다. 나도 ‘선배’가 아닌 ‘언니’로 대했다. 오징어 다리를 우물거리면서 살 빼고 싶다고 툴툴대는 내게 ‘언니는 좀 굶어도 된다’는 잔소리를 했고 자기와 함께 요가원에 다니자고 권했다. 당시 유행한다는 블랙 커피 다이어트 비법도 대방출했다. 여러모로 비범한 녀석이었다.


각자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더 이상 녀석의 꿀팁을 들을 일이 없었다. 그 아이는 고향에 내려가 취업을 했고, 나는 다른 꿈을 좇기 위해 학교와는 먼 동네로 이사를 갔다. SNS 친구로 다시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꽤 오래 서로를 잊고 살았다.


우리가 다시 연락이 닿은 건 2020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 아이가 인스타그램에 등판하면서 DM으로 가끔 귀여운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망한 앞머리를 찍어 올린 사진에 ‘우리처럼 생기다 만 애들은 이런 머리 하면 안돼요’라던가 ‘우리는 키도 작은데 손까지 작아서 굴욕이다’ 같은 내용이다. 혹자는 ‘왜 지적이야?’ 의문이겠지만 그 아이의 캐릭터를 알면 기분이 나쁠 수가 없다. 자조 섞인 시비는 그 아이의 애정표현이자 전매특허였으니까.


그렇게 간간히 안부를 주고 받고, 그 아이와 어울리는 귀여운 10학번 후배들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통해서 근황을 확인했다. 그 아이는 내게 요가를 권했던 시기부터 최근까지 계속 요가를 해서 요가원을 차려도 될 수준의 요기니로 거듭났다. 그 아이의 잔소리가 타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는지 녀석의 신체는 아름다운 잔근육으로 가득했다. 자신에게도 엄격한 삶을 살았음을, 즐기는 와중에도 절제할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 아이가 하늘나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늘은 내 승진이 확정된 날이기도 하다. 꽤 높은 연봉 인상에 뿌듯해하고 있을 때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직면한 것이다. 성취의 기쁨에 고취되기도 전에 상념에 빠지고 말았다. 


주마등처럼 녀석과 보낸 20대의 시간들이 스쳤다. 오늘은 너무 좋은 날이라, 회사에서 울면 ‘연봉 좀 올랐다고 그렇게 좋아요?’라는 오해를 받을까봐,,,라는 핑계로 가까스로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까지는 통제 수 없었다. 인수인계 받은 프로세스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할까봐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들어매야 했다.




X야. 오늘은 참 포근한 날이었어. 덕수궁 돌담길에도 꽃이 피기 시작했더라. 남들보다 늦게 취업을 한 나는 항상 커리어와 연봉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 승진을 통해 해묵은 열등감을 털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저 꽃들처럼, 나의 앞날도 만개하겠다 싶었지. 


감히 다 피우지 못했다는 표현으로 너의 삶을 재단하지 않을게. 너의 삶은 내내 만개했을테지. 워낙 야무진 아이라 어련히 잘 지내고 있으리라 굳게 믿었는데 이런 소식을 안겨 주다니 너도 참 야속하구나. 사회인이 되고 나서는 교류가 뜸했지만 가끔 오는 너의 DM이 나는 참 반가웠어. 


떠나는 네 발걸음도 가볍진 않을 테니 원망은 고이 접어 둘게. 남은 우리는 서로 아끼고 보듬어가며 씩씩하게 살아갈게. 너의 베스트프렌드였던 귀여운 친구들의 안부도 챙겨가며, 여유 있고 따뜻하게 나이 들어 갈게.


하지만 남편까지 곯아떨어진 야심한 시간인 지금은 너를 추모하면서 눈물샘을 좀 열어야겠어. DM으로 간헐적으로 시비를 걸어오던 사람이 없어지니까 좀 허전할 것 같거든. 하숙집 할머니 기억나? 그 할머니 아직도 정정하실 것 같은데 넌 왜 이리도 빨리 떠났니. 이제 하숙집 할머니 흉은 누구랑 봐야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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