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뽕아 서울에선 눈 뜨고 코 베인다는데 조심하래이”
“서울 애들 웃는 얼굴로 통수치더라. 마음 주지마.”
상경을 앞두고 있던 2008년, 주변 어른들은 나의 서울살이를 걱정했다. 정확히는 삭막하다는 서울 인심에 내가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했다. 과외 선생님은 서울 사람에게 뒤통수 맞았던 일화를 들려줬고 이모들은 앞다퉈서 기죽지 말라며 나를 응원했다. 학구열이 피 터진다는 서울 대치동에서는 학생들이 경쟁자의 필기 노트를 찢어 버린다는 루머가 들었던터라 잔뜩 긴장한 채 서울로 향했다.
부산 아이 필터가 씐 상태라 그런걸까. 네이티브 서울리안들은 좀 달라 보였다. 성인이 됐다고 공작새처럼 화려한 옷으로 무장한 나와 달리 그 친구들은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이었다. 내가 10년의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체득한 ‘꾸안꾸’의 미학을 그 아이들은 이미 실천하는 모습이었다. 요즘이야 SNS 같은 창구 덕분에 모든 지역의 청년들이 비슷하게 세련 됐지만 그땐 도시 출신과 지방 출신의 모습이 조금 달랐다. 부산도 대도시라면 대도시지만 부산과 서울의 차이조차 꽤나 크게 느껴졌다. 송이버섯 같은 단발머리에 원색 옷만 고집했던 나는 쉬이 좁힐 수 없던 외양의 차이에 약간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반전이 시작됐다. 서울사람 A는 불 꺼진 청량리행 열차에서 멍 때리는 내게 청량리행과 소요산행의 차이를 친절하게 알려줬다. 또 다른 서울사람 B는 자신의 동네에 나를 초대해 청소년기를 보냈던 학교를 구경 시켜주고,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일화들을 들려줬다.
물론 빌런도 있었다. 자신을 강남 사람으로 소개했던 선배 C는 내 출신지와 옷차림을 두고 대놓고 촌스럽다고 평했다. 그리고 대놓고 수도권 출신의 친구들만 챙겼다. 너무 대놓고 그래서 기가 죽을 겨를도 없었다. 그냥 최선을 다해서 저 인간과 접점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뿐이다. 그때 서울사람 D가 내 손을 잡고 문제의 술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D는 필기 노트 루머의 산지(?)인 대치동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D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한다. “저런 사람 말 귀담을 필요 없어.”
서울에서 보낸 첫 6개월 이후 굳이 ‘서울 사람’을 의식하지 않게 됐다. A, B, D를 비롯한 서울 사람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정을 받으며 차별적인 인식을 중화한 덕이다. 어떤 친구의 어머니는 홀로 상경해서 지내는 내가 안쓰럽다며 친구를 통해 말린 과일을 건네 주셨고, 어떤 친구들은 집에 초대했다. D는 처음 만난 20살부터 지금까지 매년 손으로 쓴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낸다. D는 만날 때 마다 간식이니 선물이니 건넸는데, 한 번은 내가 어쩔 줄 몰라하니까 새침하게 말했다. “야 그냥 받아 나 원래 이런 년이야.” 이런 년과 친구로 지낼 수 있다니. 서울살이는 눈 뜨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는 것과 같았다.
결국 사람 사는 건 어딜가나 비슷한 것이었다. 서울에 사람이 몰려 있으니 당연히 나쁜 사람과 마주칠 확률이 높을 터. 그만큼 온정을 나눠줄 준비가 된 이도 많다. (사실 ‘온전한 서울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란 것도 모호하다). 타지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지역별 출신자의 특색을 정리해서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만나든 나를 지킬 수 있는 판단 기준을 세우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을 특정 카테고리에 포함시켜서 인식하는 건 편리하다. 그만큼 무책임하기도 하다. 그 카테고리가 미처 반영하지 못한 특성을 걸러 버리니까 말이다. 몇몇 고마운 존재들 덕분에 내 인생에서 ‘서울 사람’이라는 개념은 사라져버렸다. 그냥 좋은 사람, 다정한 사람, 차별을 일삼는 사람, 배울 점이 많은 사람, 못된 사람 등이 존재할 뿐이다. 올해로 서울살이 17년차에 접어들었고 나의 코와 뒤통수는 아직 온전하다. 천만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