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에 자존감이 낮았다. 사회나 커뮤니티가 설정한 기준에 나를 맞추는데 급급했다. 예쁘고, 상냥하며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똑똑하기까지 한 그런 사람이 되는게 인생의 목표였다. 여드름이 나거나 살이 찔 때마다 예쁜 사람의 기준에 멀어지는 것 같아 큰 죄책감을 느꼈고, 누군가 나를 함부로 대해도 그 사람까지 포용하려고 애썼다. 혹자로부터 평가의 말을 듣기라도 한 날엔 끙끙 앓았다. 그 평가가 호평인 경우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한 기분에 고취됐다.
나의 인식틀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건 20대 중후반 이후의 일이다. 난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는데 왜 달라지려 하는거지, 왜 얘를 만나면 어김없이 기분이 더럽지, 이 인간은 지가 뭔데 매일 평가야. 의문이 생길 때마다 부정적인 감정의 근원을 찾아나섰고 나름의 답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스스로의 기준을 중심에 두고 초조한 마음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독이 되는 관계는 멀리했다. 인생이 한결 더 재미있어졌다. 남에게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 하나만 벗겨냈을뿐인데 자유로워졌다.
예전에 엄마가 살이 찐 나를 두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 그럼 남자친구가 너 떠난다.” 사랑하는 엄마지만 딸에겐 해선 안될 최악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가족 쉴드같은거 없는 강T다.) 다행히 결혼 후 10kg가 쪄도, 8kg를 다시 빼도 한결같이 사랑해주는 사람을 배우자로 맞았다. 그는 미국 여행 후 얼룩덜룩 내 몸을 덮은 빈대자국을 안타까워한다. 못나보여서가 아니라 얼마나 가려웠을까 안쓰러워서. 남편에게 이성애적 사랑을 넘어 인간으로서 보살핌을 받은 덕분에 나의 가치를 의심하는 빈도가 더더욱 줄어든 것 같다.
특히 테니스를 시작한 이후 외모에 대한 강박을 더 버려야할 수 밖에 없었다. 피부가 까맣게 타고, 팔다리에 근육이 잡혀 ‘여리여리하고 사랑스러운 여성적 이미지’와 영영 멀어진 탓이다. 하지만 새로이 획득한 외양이 나는 정말 마음에 든다. 까맣게 탄 피부는 테니스를 열심히한 증표고, 근육은 전리품이니까. 게다가 건강을 얻었다. 건강하다는 건 좋은 기회를 충만한 에너지로 누릴 수 있는 더할나위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You look strong.“ 요세미티에서 가벼운 대화를 나눴던 미국인 아저씨가 내게 이 말을 건넸을때, 처음엔 폭소했지만 곱씹을수록 기분이 좋았다. ‘새벽에 부지런떨었던 보람이 있네, 추위와 더위를 불사하며 코트에 나갔던 시간들이 내 모습에 그대로 반영됐구나’ 생각했다. ‘strong‘한 너는 사진으로는 담기지 않는 요세미티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튼튼한 두 다리로 누빌 자격이 된다는 찬사로 들렸다.
또 미국에 간다면 그땐 로드트립으로 요세미티에 방문해 트레킹을 할테다. 가장 좋아하는 파타고니아로 깔맞춤하고, 달다구리를 가방에 가득 채운 다음 내 최고 지지자인 깜보의 손을 잡고 포인트를 하나하나 점령해 나가야지. 튼튼한 몸이 필요할테니까 먹거리에 더 신경쓰고 테니스도 지금처럼 열심히 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