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불행이 시작됐다
우리는 매주 토요일마다 돌아가면서 커피 머신을 청소한다. 주말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는 깜보는 커피 머신을 청소하기 전에 내가 마실 커피를 미리 만들어놓고 냉장고에 넣어둔다. 기상 후 해체된 커피 머신이 깨끗히 세정되어 건조대에 올려진 모습을 본 나는 그대로 냉장고로 직행한다. 문을 열면 깜보가 얼음 한가득+에스프레소 투샷 황금 비율로 만들어둔 아메리카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나, 깜보가 세척 당번인 주라 나는 자연스럽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커피 위에 무언가 올려져 있었다. 크리스마스 카드였다. 카드엔 깜보의 자화상이 담겨있었다. 입꼬리가 찢어지게 웃고 있는 카드 속 그림이 너무 귀여워서 막 자다 깬 흉측한 몰골로 깔깔 웃었다. 사소한 생활 패턴에 가벼운 변주를 줘, 일상의 순간마저 소중한 추억으로 만드는 깜보의 마력에 속수무책 빠져들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도 그런 순간은 종종 찾아왔다. 산책을 다녀온 그가 불쑥 건네온 내 최애 산체스 커피 한 잔, 우리집 에어컨 실외기에 둥지를 틀려던 비둘기에게 따끔한(?) 경고를 하는 모습(야~! 너 여기 집 지으면 안돼!), 새로 산 가죽구두에 얼굴을 파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는 엉뚱한 모습(은혜야 너도 맡아봐! 장인의 냄새야). 누군가 사랑은 서로가 일이 아니라 쉼이 되는 관계라고 했는데, 그 관점대로라면 나는 제대로된 사랑을 하고 있었다. 작은 행동으로 온갖 번뇌를 잊게하는 사람 덕분에.
하지만 최근들어 작은 행복이 설 자리를 잃었다. 우리집을 가득 채웠던 실소와 엉뚱함은 한숨과 깊은 고민으로 바뀌었다. 깜보의 이직이 원인이었다. 8년을 동고동락한 첫 직장이 공중분해될 위기를 맞은 깜보는 어쩔 수 없이 두번째 직장을 구해야 했다. 운 좋게 좋은 복지와 온화한 동료들이 그를 맞았고, 빠른 시간에 적응하며 자기 자리를 찾아나갔다. 그러다 호기심반, 도전 반으로 현재의 직장에 지원했고 그곳을 세번째 직장으로 맞게 됐다.
처음엔 온 가족이 기뻐했다. 시부모님은 '너도 욕심이란게 있었구나' 자랑스러워했고, 주변 친척들은 이 회사의 주식을 계속 보유해야 할지(ㅋㅋ)물었다. 당사자인 깜보만 이 선택이 옳은 것인지 혼란스러워했다. 그리고 출근을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 됐을 때 잘못된 선택인 것 같다는 예감을 받았다. 약 3달 출근한 지금은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며 매일 머리를 쥐어뜯는다.
격무와 상부의 압박, 차가운 동료들의 틈바구니에서 깜보는 웃음을 잃었다. 주말엔 멍하게 소파에 앉아있기 일쑤다. 그 좋아하던 드라마 정주행도 잘 못하겠단다. 평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무언가에 집중할 기력이 없다는 이유다. 나 역시 생기를 잃어가는 배우자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일이 힘들다. 그러면 안되는걸 알면서도 어떤 날엔 '평일엔 나도 힘드니까 좀 자제해달라'며 버럭한다. 질러놓고 돌아보면 배우자의 기죽은 얼굴이 눈에 들어와 가슴이 아프다. 다시 그를 다독이며 우리 잘 버텨보자 말하지만 이 한계 상황을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미리 만들어둔 커피의 고소한 맛과 익살맞은 그림, 비둘기와의 기싸움 같은 사소한 일들이 가져다준 몽글몽글한 감각이 아무리 움켜쥐어도 스스륵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느껴진다.
주변 어른들은 '가장의 무게가 그런것'이라며 버티라 종용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중 누구도 가장이 아니며, 서로를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나는 2024년에 산업 역군 정신을 주문하는게 가당한 것일까 자문하게 된다. 그러다가도 얼어붙은 경기와 미쳐 날뛰는 아파트값에 무의식적으로 '지금은 그런 것(역군 마인드)도 필요한게 아닐까' 생각하는 나 자신이 소름끼치게 느껴진다. 오늘도 퇴근 버스의 마지막 출발 시간이 지나도록 회사를 떠나지 못한 깜보를 기다리며 온갖 생각에 시달린다. 크리스마스 카드 속 행복한 웃음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