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통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간다. 진료를 받고 약을 먹고 쉬어준다. 에너지가 넘치고 체력이 남아도는 날에는 운동도 하고 나들이도 간다. 내 몸의 상태를 바라보고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해준다.
아픈 몸을 돌아보지 않고 혹사시키면 병에 걸리고 만다. 많이 먹고 움직이지 않으면 살이 찐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상태에 맞는 표현을 마음껏 해줘야 아프지 않다.
나도 엄마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던 날. 시험관 네 번째 시도만에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라는 통보를 받았던 날. 감사했고, 감격했고, 절로 눈에서 폭포수가 터져 나왔던 그날. 날짜를 계산하면 아마 임신 4주 정도 됐을 것이다.
자궁 외 임신임을 알고 5주 5일 차에 복강경수술을 하며 작은 세포와 함께 왼쪽 나팔관을 떼어내던 날까지 나는 줄곧 노심초사했다.
'행여나 잘못되면 어쩌지.'
'조심해야지.'
음식을 먹을 때도, 걸을 때도, 침대에 누울 때도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행동했다.
생각해 보니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 수술대에 오르기까지 10여 일 남짓한 기간 동안 난 단 한 번도 마음 놓고 기뻐하지 못했다. 수술 이후 그게 가장 미안했다. 하늘나라에 간 작은 생명에게도, 마음껏 기쁨을 누리지 못한 나 자신에게도.
보통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일희일비를 그대로 풀면 하나의 기쁨과 하나의 슬픔이다. 기뻤다가 슬펐다가 하며 금세 변하는 인간의 마음을 뜻한다.
왜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말이 생겼을까? 유교문화가 깊게 자리 잡은 우리나라에서 타인의 시선은 중요하다. 나의 감정을 가감 없이 표출하는 행동이 점잖아 보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쁜 일에 마음껏 기뻐할 경우 다른 사람이 보기에 겸손하지 못하다는 우려와 동시에, 슬프거나 힘든 일은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한다. 인생사 새옹지마이니 하나의 감정에만 매몰되지 말라는 의미도 있겠다.
하지만, 기쁠 때 마음껏 웃지 않고 슬플 때 충분히 울지 않으면 마음이 곪는다. 그리고 그때로 돌아가 후회하거나 다시 아파하게 된다. 나는 임신을 통보받던 날로 다시 돌아가 작은 생명에게 반가움과 기쁨을 전했고, 괜찮다고 이제 괜찮아졌다고 애써 빠르게 외면했던 슬픔 앞에 직면해 다시 울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내 감정에 충실하며 살기로 했다. 기쁜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슬퍼하며.
충분히 기뻐하고 바닥까지 슬퍼해야 건강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남은 평생 나는 그냥 일희일비하며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