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식 49제는 3시간이 넘게 진행됐다. 뜻 모르는 경전을 외는 스님 목소리가 법당을 채웠다. 고인을 추모하기 위함이라지만 주문 같은 독송에 집중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 머릿속에는 염불 소리를 배경으로 우리 할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기억이 하나둘씩 찬찬히 떠올랐다. 내가 태어난 직후부터 35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들어온 할머니의 이야기 말이다. 선명하진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흐릿해질 기억을 글자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 할머니의 주민등록번호는 27로 시작했다.
그녀는 나에게 역사였다. 할머니의 법적으론 1927년생이었지만, 실제론 1925년 생. 내가 교과서에서 본 역사가 할머니에겐 삶, 그 자체이었다.
할머니의 고향은 수색이다. 지금은 재개발 후 아파트가 시야를 가득 채웠지만, 그 공간은 원래 한강물이 코앞까지 들어오는 순박한 동네였다. 할머니는 어린 나이 친구들과 민물게를 잡아서 구워 먹은 이야기를 자주 했고,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게를 '이치, 니, 산, 요'라며 일본어로 세는 흉내를 냈다. 심지어 평양에 있는 친척 집에 오간 적 있다고 했으니까, 아득하고 아득한 과거다.
할머니가 몇 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동네 중매로 평안남도 개천 출신인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첫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고 큰 탈 없이 혼인을 했다. 둘은 총 6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첫아들과 첫 딸은 전쟁통에 독감으로 목숨을 잃었다. 셋째를 맏아이로 삼아 키웠는데, 우리 첫째 고모도 예순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할머니는 총 자식 셋을 가슴에 묻은 것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결혼 사진
할머니가 힘든 시기를 버틴 건 화목했던 남편과의 관계 덕분이었던 것 같다. 휴전 직후 형편이 좋았을 리가 없다. 할머니의 그 시절 이야기 속엔 18년 전 대장암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자주 등장했는데, 여전히 애정이 묻어났다. 못 먹어도 같이 못 먹고, 돈을 모아도 같이 모았다고 했던 것 같다.
그녀는 삯바느질을 했고, 남편과 고무신을 팔러 역전에도 나갔다. 한 푼 두 푼 모으는 게 쉬었을까. 할머니는 부족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젊을 때 하도 일을 해서 오른손 손가락 마디가 다 퉁그러졌다"고 까칠한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병아리를 샀고, 닭을 팔아 돼지를 샀던 시절로 이야기는 이어졌다.
다행히도 머리 좋은 남편은 곧 교직원 시험에 붙어 국민학교 선생이 됐다. 30대에 이른 나이부터 국민학교 교장을 했다는데, 그때는 사택을 지원받아 떵떵거리는 정도는 아니어도 먹고 살만은 했다. 흑백텔레비전을 동네에서 가장 먼저 장만해, 동네 사람들이 저녁을 먹고 나선 꼭 마실을 들렸다고 한다.
3. 할머니의 호시절은 서울에서 시작됐다.
부부는 자식들을 이끌고 서울로 이사를 왔고, 이때가 할머니의 호시절이었다. 할머니는 동네 친구를 사귀어 카바레를 다녔는데, 웨이터가 알아볼 정도였다. 할머니의 주종목은 '지루박'이었다. 할머니는 가끔씩 '빰빰빰' 하고 지루박 6박자를 입으로 부르곤 했는데,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크게 웃고는 했다.
여튼 그 시절, 노는 게 마냥 즐거웠던 할머니는 밤에는 할아버지와 창경궁 근처 포장마차서 소주를 마셨는데, 각자 1병씩 놓고 알아서 잔을 채웠다고 하니 웬만한 주당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할머니는 그때를 더욱 많이 언급하곤 했다. 사랑하는 남편과 곰장어에 소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면서 귀가하던 그때를 할머니는 많이 그리워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30대 혹은 40대 모습
할머니의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 삶은 옥수수를 좋아하고, 야식으로는 버스 정류장 앞 노상 포장마차에서 파는 호떡을 즐기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무슨 공상을 하는지, 들어 누워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는 그 위에 반대쪽 다리를 올려 까딱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때마다 허공이나 허벅지에 숫자나 한자를 적곤 했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할아버지는 휴지를 재활용하는 짠돌이었지만, 가족들에겐 넉넉했다. 밖에서 맛있게 먹은 음식이 있으면 아내는 물론이고 자식 넷에 사위와 며느리, 손자와 손녀를 모두 몰고는 꼭 한번 다시 찾아갔다. 암사해물탕. 나는 그 집이 딱 하나 기억난다. 모두 둘러앉아 산낙지를 통으로 넣는 해물탕과 할아버지의 취향대로 실온에 보관한 미지근한 소주를 주문하고선,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때가 있었다. 그때까지가 할머니의 호시절이었다.
4. 할머니는 딱 이름만큼 순수했다.
할머니 이름은 '정점순(点順)'. 얼굴에 점이 많은 순한 아이란 뜻이다. 할머니는 얼굴에 볼록하게 올라오는 점이 여러 개였는데, 친척 중에 비슷한 점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고 손녀인 나도 입가에 두툼한 점이 있다. DNA에 박힌 신비로운 과학이다.
그런데 할머니와 나는 성격이 달랐다. 할머니는 나나 다른 친척과는 다르게 굉장히 순한 사람이었다. 이름대로 살았던 건지, 할머니는 굉장히 순수해서 귀가 얇은 단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한 없이 너그러운 면이 있었다.
할머니는 엄마가 일찍 떠난 손녀 둘을 건사했는데, 첫째가 성격이 못됐다. 아픈 무릎을 이끌고 새벽에 밥을 해먹이는 공을 들여도, 고마움보단 투정과 짜증이 먼저였다.
암사동 시절의 할머니, 이모 할머니, 나, 첫째 고모, 그리고 손님
불교였던 할머니는 매일 아침마다 아내 잃은 막내아들과 엄마 잃은 두 손녀가 무탈하게 해달라고, 불교 방송에 나오는 예불을 청취했다. 못된 손녀 딸년은 아침잠을 방해한다며 염불 소리 좀 안 듣게 해달라고 짜증을 냈고, 할머니는 다음날부터 음소거를 해놓고 TV를 봤다. 귀 어두워지기 시작한 일흔 넘은 할머니가 볼륨을 끄고 TV를 보는데도, 모른 척하는 못된 짓만 골라서 했다.
할머니는 그래도 손녀들에게 한없이 너그러웠다. 밉상인 행동만 골라서 해도 어디 가서 기죽을까봐 그랬는지, 나쁜 소리 한 번 안 하고 대학 갈 때까지 애들을 책임졌다. 무릎이 아파 서있는 게 힘들어도 할머니는 손녀의 도시락 반찬을 고민했고, 학교 다니는 내내 쌈짓돈을 꺼내 용돈도 꼬박꼬박 챙겨줬다. 내 동생이 고3 때, 할머니는 여든을 앞두고 있었다. 그 정신에도 수능 백일을 챙겨야겠다며 나를 시켜 목걸이를 사오게 했다. "내가 데리고 자던 내 새끼" 숙정이가 20살이 되는 게 뿌듯했나보다.
5. 할머니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서울 암사동에 있는 단독 주택에 살았다. 지하에 보일러실이 있었는데, 그 안엔 언제나 고양이가 바글바글했다. 고양이 좋아하는 할머니는 19세기 캣맘이었다. 식구들이 남긴 국물에 밥을 비벼 동네 고양이들을 유혹했는데, 수십 마리가 보일러실에 서식한 것이다. 몇몇 고양이는 우리집 안으로도 자유롭게 오고 나갔고, 그중 '깐돌이'라는 삼색 고양이가 매해 거실 발코니에 대여섯 마리씩은 새끼를 낳았다.
고양이 사진을 보는 할머니
아파트로 이사한 뒤에도 할머니의 고양이 사랑은 계속됐다. 할머니는 내가 고등학교 후배에게 얻어온 '네꼬'라는 치즈 코숏을 특히 아꼈고, 매일 밤 팔베개를 하고 껴안고 잤다. 네꼬는 신장병으로 인한 고통이 극심해 16살에 결국 안락사를 선택했는데, 할머니가 충격받을 걸 걱정해 끝까지 말씀드리지 못했다. 병원에서 조용히 떠났다고 설명했던 것 같다.
할머니와 네꼬
할머니와 나와 내 동생은 한 3년 전쯤, 내가 결혼하면서 흩어졌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충청도 제천에서 둘째 딸과 함께 지냈다. 그 집엔 고양이가 3마리였고, 밥 얻어먹으러 들리는 길고양이가 여럿이었다. 시골 고양이들은, 서울에서 오래 살아 마실을 가더라도 백화점 산책을 좋아했던 우리 할머니의 유일한 낙이었다. 식당을 가도 화려한 뷔페를 선호했던 우리 할머니가 한적한 시골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건, 그 집 흰둥이들과 길고양이 가족 덕분이다.
6. 순수하고 예뻤던 할머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여기까지가 생각나는 대로 마구잡이로 기록한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와 내게 남은 기억들이다. 할머니의 수십 년 인생이 짧은 글에 담길 순 없지만, 내가 갖고 있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간직하기 위해 적는다. 49제 날, 법당의 염불 소리가 먹먹히 들렸던 날, 내 결혼식에 입었던 할머니의 한복을 태우는 순간부터 꼬깃꼬깃 낙서처럼 적어놨던 기억들을 문자로 풀어낸다.
순수하고 예뻤던 우리 할머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제 돈도 조금 벌고, 할머니에게 좋은 옷을 사주고 맛있는 밥을 대접할 정도가 됐는데. 휠체어를 타고 쇼핑하러 가서도 "난 이거 필요 없다"고 하면서도 눈길 한 번 슬쩍 주던 그 옷들, 할부를 끊어서라도 이제 사드릴 수 있을 거 같은데. 올봄에는 꼭 한 번 할머니랑 제주도 여행을 가보고 싶었는데. 미뤘던 모든 계획이,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함께 그 자리에 머물게 됐다. 후회와 사과, 그리고 기억 속 할머니를 다시 떠올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인 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