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amGH Mar 09. 2020

[생각02] 딱 5일 동안 암환자

멀쩡한 몸에 대한 의무

엄마가 유방암이었다. 딱 내 나이 때 시작된 병은 만 마흔이 되기 전에 그녀를 꺾었다. 항암 치료와 수북이 빠지는 머리카락. 방사선 치료와 재발. 엄마의 생명을 앗아간 병마는 내 기억 속에도 선명하다. 엄마가 떠난 뒤 빈 공간이 여전히 삶에 영향을 미치면서, 암은 우리 가족에게 트라우마로 각인됐다.


초음파 검사 중 의사는 얕은 숨과 함께 "음" 소리를 냈고, 그 작은 반응에 겁을 먹어 명치가 딱딱하게 굳은 이유다. 지난해 말 받은 건강검진에서 추가 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소견으로 뒤늦게 유방전문병원을 찾았을 때다. 의사는 나의 왼쪽 가슴을 관찰하다, 가족 중 유방암 환자가 있는지 물었다. 엄마와 이모의 병력을 알려주자, 조직검사를 권했다. 가장 긴 길이는 3cm로 악성 종양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동그란 섬유종과는 다르게 넙적하게 영역을 차지한 병변이었다. 국소 마취를 하고 "탕" 소리가 나는 총으로 10차례 정도 몸속에 있는 세포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조직검사 후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5일이 걸렸다. 무서운 시간이었다.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으면 조직검사 후 시꺼멓게 피멍이 든 가슴이 드러났다. 상처를 볼 때마다 검사실에서 뜨끈하게 등 뒤를 타고흐르던 피가 느껴졌고,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시에 현실화될 가능성이 농후한 투병생활이 바로 코앞에 와있는 듯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 머리가 빠질 텐데 돌아다닐 수는 있을까

-투병 생활이 길어지거나 재발이라도 하며, 나는 정신적으로 견딜 수 있을까

-회사에서는 병가를 받을 수 있을까

-장기 휴가를 받는다면 팀원들의 업무 부담이 늘어날 텐데

-퇴사를 해야 한다면, 투병 유튜버가 돼야 하나

-재취업은 할 수 있을까

-마이너스 통장은, 대출금은 매달 어떻게 채워 넣을 수 있을까

-암보험 없이 치료비는 어디서 감당할 수 있을까

-가족들에게는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내가 투병하면서 가족이 겪게 될 경제적, 심리적 부담은 어떻게 하나


끝없는 걱정은 24시간*5일을 꽉 채웠다. 내 몸이 겪는 고통은 둘째 치고, 주변 사람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이 걱정됐다. 암이라는 병은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겪게 될 테니까 말이다.


당장 가계 소득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부터 문제다. 병원비는 물론이고, 내가 사인해놓은 각종 대출 상품은 누가 책임질까. 열심히 근무하겠다는 회사와의 약속도 지키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것은 투병하는 모습을 봤을 때의 가족의 심리적 불안 극에 달할 것이다. 초기에 발견한 유방암의 5년 생존율이 90%를 넘나 든다고 해도, '암'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는 생각보다 크다.


역시나 함께 저녁을 먹다 꺼낸 검사 소식은 우리 가족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아빠는 조용히 돌처럼 생긴 버섯 더미를 들고 찾아왔다. 항암효과가 있는 상황버섯이라며, 끓여서 물 대신 마시라고 말했다. 동생은 전 직장 동료들을 통해 대학병원 예약을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유일한 동거인인 남편은 5일 내내 집안일을 도맡았고, 자기가 준 스트레스 때문일지도 모른다며 눈꼬리를 내렸다.


자책이 묻어나는 남편의 말투에 거꾸로 미안함이 솟았다. 나에 대한 걱정과 책임이 동시에 느껴졌다. 가족이 겪는 미묘한 불편함이 나로 인해 시작됐다는 건 작은 죄책감을 주기도 했다. '혹시 암으로 확진받는다면, 가족 분위기는 어떨까.' 어떤 밤은 걱정에 멀뚱멀뚱 눈을 뜨고 유방암 카페를 탐색했다.


다행히도 며칠 동안 속을 태웠던 지름 3cm의 걱정거리는 양성이었다. 다만 악성 종양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 제거 수술이 필요하다. 아직은 큰 걱정 없이 제거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암으로 번지기 전에 발견한 것이 행운이라며 한숨을 내쉬고, 대학병원에 날짜를 잡아놓은 상태다. 회사를 그만두지 않아도 되고, 주변의 걱정을 조금은 덜 수 있게 됐다.


나 자신을 위해 건강한 몸 상태는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주변에 소중한 사람이 늘어갈수록, 그리고 벌여놓은 일들이 늘어갈수록, 아프지 않아야 하는 책임은 더 커진다. 멀쩡한 몸을 유지해야 하는 의무가 강해진 느낌이다. 검사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자 아기가 있는 몇몇 친구는 아들 때문에, 딸 때문에 절대 아플 수가 없다고 했다. 나도 가족과 우리 고양이를 생각한다. 검사를 받는 것만으로도 걱정해주던 내 식구들 말이다. 또 연봉계약서에 내 손으로 사인하고, 은행 대출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순간. 건강한 몸으로 지켜야 하는 약속이 늘어났다는 점과 자칫 이 의무가 가족에게 넘어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한다.


가슴속 종양을 떠올리며, 아프지 않는 게 왜 중요한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생각할수록 더욱더 절대 아프고 싶지 않다. 멀쩡한 몸으로 내 일상을 지키고, 동시에 나를 둘러싼 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


그 좋아하는 술을 2주째 마시지 않았다. 대신 아빠가 갖다 놓은 상황버섯을 우린다. 끓어오르는 증기를 먹먹히 보면서 예약해놓은 큰 병원의 진료 날짜가 얼른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각01] 고양이 때문이 아니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