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04] 정성스러운 헛소리
반도체공장 같은 나의 삶을 생각하며
요즘 애들은 곧 잘 쉰다지. 요즘 애들은 워라밸이 중요해서 회사를 때려치우고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한다지. 제주도 푸른 밤을 즐기며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다지.
그런데, 그 부러운 요즘 애들에 나는 왜 속하지 못하는지 가끔 억울할 때가 있다. 혹은, 이런 내가 한심하기도 하다.
우리나라 2700만 직장인의 삶은 꼭 반도체 공장 같다. 잠깐 정전이라도 된다면 만들던 생산품을 전량 폐기하고, 다시 공장을 돌리려면 며칠씩 전체 공정이 멀쩡히 작동하는지 확인해야 하는, 그 두려움이 팽배한 공간 말이다. 단 30초밖에 멈추지 않았는데, 수백억 원의 피해를 야기하는 결과가 눈에 뻔하다고 한다. 살이 떨려서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사람들.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하고, 임시공휴일이 붙은 '황금연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인물들. 타이트하게 당겨진 일상에서 줄타기를 하느라 온몸에 바짝 힘을 준 상태로, 한 번 멈추면 막대한 피해가 올 거란 잠재적 두려움을 안고 사는 우리들 말이다.
가끔씩 정수리까지 차오른 스트레스를 꾹 눌러 내고, 타이레놀 한 알을 삼키며 출근을 한다. 빽빽하게 들어찬 지하철에 발을 들여놓고, 모두가 똑같이 내쉬는 답답한 한숨 냄새를 맡으며,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옆으로 좀 비켜보라며 짜증 가득한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사무실에 들어서도 비슷하다. 내가 하는 일이 가장 급한데, 참고할 자료를 서둘러 주지 않는 동료를 타박하고, 통과되지 않은 기획안을 묵묵히 바라보며, '답이 없다'라고 사고의 회로를 멈춰버린다. 사무실 밖에서는 달라지나. 아니, 내 친구 하나는 회식 자리에서 상사에게 폭언을 들었고, 손지검도 당했다. 일로 받는 스트레스도 끔찍한데, 그보다 더한 최악의 인간이 만들어낸 진짜 최악의 사건이었다.
안정적인 소득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회사에 가고, 사직서를 던지지 못했다. 품고 있던 칼로 회사와 내 손가락에 묶인 실을 잘라내는 순간, 나의 반도체 공장이 멈출 것 같아서. 회사가 그럴싸하게 쳐놓은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막대한 경제적 부담은 물론이고, 다시 나의 공장을 가동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다. 무턱대고 휴식을 선택한 뒤, 실업급여가 모두 지급됐는데도 먹고살 길이 안 열린다면 진심으로 낭패다.
지난해 제주의 함덕, 푸른 바다 위에 거대한 연을 띄우고, 발에는 작은 판을 하나 끼운 채 몸을 수면 위로 날리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휴가를 쓰고, 비행기를 타고 내려와서, 바다가 보이는 좋은 카페에 앉아서도, 다음날 출근을 걱정하는 나와는 대척점에 있는 것 같았다. 본인의 장비로, 인솔자 없이 혼자 파도와 바람을 가르는 모습을 보니 그 사람에겐 바다가 일상이었다. 나의 일상과는 너무 달라 보였다고나 할까. 단전에서부터 부러움과 질투가 동시에 스멀스멀 올라왔다. 물론, 그도 고통과 고뇌가 있겠지만, 나에게 그는 단지 표상이었다. 나와 대비되는 즐거움과 여유로움, 그 이상의 가치를 누리고 있는 대상으로서 존재했다.
갑자기 카이트 서퍼가 떠오른 특별한 이유는 없다. 온몸을 누르는 장맛비를 몰고 온 이 묵직한 저기압에, 큰 맘 먹고 급하게 월요일에 연차를 지른 뒤, 창밖의 회색 풍경 대신 멀뚱멀뚱 맑은 하늘을 보고 싶었기 때문일까. 습기에 취약한 나는 눅눅한 여름 공기에 KO를 당하고는, 제주 함덕의 카이트 서퍼를 떠올렸다. 오늘은 아무도 업무 전화를 하지 말라는 마음의 소리를 반경 100km에 퍼트려놓고, 답답한 가슴팍을 뚫어주는 이미지를 그려내고 싶었나 보다.
능수능란하게 카이트 서핑을 즐기는 그 사람은 행복을 찾기 위해 무엇부터 시작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카이트 서퍼의 밝은 형광 주황색 수영복과 진한 감색 티셔츠, 까무잡잡한 다리 색깔과 미러 선글라스와 함께 질문 몇 개가 떠오른다. 반도체 공장처럼 사는 나 같은 평범한 인간들은, 왜 놓지 못할까. 동시에, 그는 자기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추구하는 가치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그리고 그 가치를 현실로 끌어올리기 위해 무엇을 준비했을지도 알고 싶다. 예를 들면, 다음 달 카드값이나 제주도 정착 비용이나 수도권에 남은 가족들 말이다.
오늘은 휴식을 취하는 날이다. 습기 가득한 공기는 팔다리에 들러붙어 끈적거리고, 숨을 가쁘게 만들지만 그래도 출근 안 하는 월요일은 대단하다. 쓸 데 없는 소리를 정성스럽게 늘어놓게 만들었고, 내 삶의 가치를 어디서부터 찾을지 고민하게 했다.
그래도 말이다. 다만, 이 순간 무엇보다 간절한 건, 이번 주에는 정말 로또가 꼭 됐으면 좋겠다는 희망과 바람. 아, 이 딱하고 평범한 월급쟁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