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마다 찾아오는 장염 때문에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다가
슬슬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더니 5월의 퀘청한 날 털썩 감기에 걸렸다.
오랜만에 몸의 모든 기능이 멈추고 감각이 마비되고
온몸이 통증으로 부들부들 떨린다.
어제는 통증을 무시하고 출근해서 일을 했다
일에 집중하느라 그럭저럭 하루가 갔다.
아침에 눈뜨니 아무것도 하면 알 될 것 같아, 자리에 누웠다.
몇 달간 바빠서 정신없이 일만 했으니 몸이 탈이 났다.
몸만 바쁜것도 아니었다.
정신도 여기저기 열정에 휘말려 잠시도 온전한 적이 없었다.
오전 내내 잠만 자고 또 누워있다가 핸드폰을 들고 글을 쓴다.
목이 따갑고 온몸이 쑤신다. 눈을 감고 통증을 느낀다.
통증이라는 이 증상은
세포들이 나에게 보내는 일종의 언어이다.
몸이 평온할 때는 절대로 만나지 못하는
녀석들의 살아 숨 쉬는 언어 통증. 누군가는 이 증상을
고통이라고 이야기하고.
나는 몸의 언어라고 해석한다.
병원에 가라는 신랑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몸의 언어에 귀를 기울인다. 감기증상은 늘 패턴을 따라 움직인다.
어김없이 일주일을 꽉 채우면서 하루하루 순서대로 아파온다.
약 먹어도 일주일 약안 먹어도 7일이란 말을 복기하면서
생생한 통증을 선택한다.
나이가 드니 감기가 이주일동안 갈 때도 있다.
화요일부터 시작됐으니 오늘 3일째다. 작년에는 감기 한번 없이 지나가더니... 제대로 딱 걸렸다.
감기에 걸리면 약안 먹는다는 원칙이 평생의 믿음이었고.
그 믿음은 감기를 견디게 한다.
인간에게 감정이 생기는 이유는 몸에서 일어나는 상태를 제어하기 위해서 이다.
감정이 통증을 인식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판단을 한다.
나는 통증을 느끼며 자연치유를 결정한다.
통증은 느끼지만 고통을 상대적으로 적게 느끼는 사람은 오랜 수행의 결과일 수도 있다.
삼국지에서 관우가 독화살을 제거하면서 살을 찢고 치료받을 때 바둑을 두었다는 얘기가 단지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통증을 언어로 인식하고 몸과 대화히기 위해
내가 가진 생물학적 지식을 상상으로 가져와 본다.
지금 온몸이 아프지만 사실은 뇌의 신경세포가 자극을 받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
내 몸속 모든 세포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에서 왔다. 자연은 40억 년 전 나를 만들어 냈다.
내 세포 속에서 우글거리고 있는 박테리아는 미토콘트리아이고,
미토콘드리아는 40억 년 전 독립된 원액세포였다.
혼자 잘살던 단새포 녀석이 딴 놈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놈과 공생하게 된다.
둘은 20억 년을 공생하다가 바로 하나의 생명체로 진화한다.
우리의 몸은 미토콘트리아가 지배하는 이동하는 미토콘트리아의 서식지이다.
나의 유전자는 해파리나 바퀴벌레유전자와 50프로 동일하다.
우리는 같은 미토콘드리아를 가지고 있으며 같은 박테리아 조상을 가진다.
자연 속에서 모든 생명은 의미가 없다.
지금 나의 고통을 몸의 언어라고 의미하고 있는 이 순간.
어쩌면 나는 내가 아니다. 지금 내가 사유하고 있는 이 시간.
난 지금 무슨 대단한 글을 쓰고 있는 듯 보이지만 박테리아의 거품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개미 한 마리가 길거리의 행인에 의해 죽듯이
오늘도 누군가 한 사람이 지구상에서 죽는다. 그러니까 내가 오늘
감기가 심해져서 병원한번 안가고 폐혈증이나 폐렴으로 죽는다 해도 바이러스의 거품현상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지금 내 몸은 모든 세포들이 외부에서 침투한 바아러스와 싸우느라 전투태세이다.
지금 내 감정은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 세포들의 언어들을 느낀다.
때로 바이러스와 공존하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 사멸하는 자살세포의
숭고한 죽음을 느끼기도 한다.
외부에서 들어온 바이러스의 박멸이 아닌 공존을 위해 일주일이라는 공생의 시간은
20억 년에 비하면 순간의 시간이다. 굳이 약물을 투여해 이 아름다운 공생에 잡음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것이 몸의 언어를 감정으로
제어하는 나의 선택이다.
이런 공생이 실패한다면 병원으로 달려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내 몸속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소리를 듣기에는 고통이 더없이
살아 숨 쉬는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
이 언어를 이해해서
언젠가 찾아올 죽음이라는 신비를 아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경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