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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 우리 삶의 축소판.

다른 게 뭐 있나?

by 토끼

좋은 영화란 영화가 끝나고 앤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그 순간 영화는 끝났지만.

음악이 흐르고 스태프들의 이름들이 빼곡히 올라가는 시간 까지도 희망도 절망도, 비극도 아닌

알 수 없는 감정의 흐름 속에서, 나만의 정답을 찾아, 우주미아가 된듯한 가슴 벅찬 질문들이

은하수 별처럼 쏟아지는 경험이 자연스레 올라오는 순간이다.


미키 17이 끝나고, 음악이 끝나고, 불이 켜졌지만, 아무런 질문이 쏟아지지 않았다.


분명 감동에 벅차서 보았는데, 이게 뭐지? 왜 이렇게 착하고, 말랑말랑한 결말인거지?

아! 아무 생각도 안 나네..... 다시 미키를 죽이고 싶어지는 폭력적인 투덜거림이 쏟아졌다.

블랙코미디적인 요소가 너무 강해서인가!

아니면 너무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려 해서인가!

리얼리티나 개연성이 부족해서인가!

이런 친절하고 해피엔딩 가득한 봉준호 영화는 처음이라.... 그저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기생충 이후로 시간이 흘렀으니 봉준호가 조금은 달라졌다.


색다른 SF영화, 사회적 메시지, 봉준호식 문제의식은 영화 안에 종합선물세트처럼

꽉 차 있었다. 재미 감동, 메시지 거기에 쉬운 서사까지 더해져, 힘 빼고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죽음과, 자아, 사랑, 노동자의 현실, 명청하고 자신의 이익추구에만 관심 있는 지도자, 인간존재의 가치에 대한 철학적 이야기들이 좋았다.

인간의 자아라는 다면적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늘 느끼는 거지만 봉준화 영화에서는 모든 인물 간의 운명적 삶이

봉준호식 세계관에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주연이고 조연이고 간에

자신의 삶을 비관하거나 그 삶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거나, 타인들을 원망하거나, 한을 품지 않는다. 기생충에서의 기구한 가족 누구도, 자신의 삶에 생채기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사기를 치더라도 지금 처한 환경에서 조금 더 나아지려고

최선을 다한다. 마더에서 어머니는 세상을 향해 절규하지 않고, 아들이 살인자가 아니라는 종교 같은 믿음으로 모든 사건들을 조작하고, 덮는데 자신의 모든 걸 바친다.

괴물에서 가족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맞서며 괴물을 향해 정면 돌파한다.

그의 영화의 캐렉터들은 정말 아등바등 열심히도 산다.


신을 기만한 죄로 바위를 산 정상으로 굴려 올리는 형벌을 저승에서 무한 반복하는 시시포스처럼,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죽을 때까지 먹고, 일하고, 자는

루틴을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 사회, 가족공동체라는 장소에서 마주하는 일상들은 반복하는 루틴을 더 생지옥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모든 생명체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인데,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이제는 살다 살다, 17번을 죽으면서 또 살아야 하는 미키가 등장한다.



생명이 다한 지구를 떠나 인류의 개척지를 탐험하는 우주선에 탐승한 미키는

가진 것도 없고 재능도 없는 평범한 남자다.


친구의 꼬들김에 넘어가 마카롱 사업을 하고 폭삭 망해서, 거액의 사채업자의 빚 독촉 때문에 신체포기 각서까지 쓰고 하루하루 목숨이 위태롭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한가지 탐승조건으로 미키가 지원한 일은 비인간적인 기술로 반복 재생되는 죽어야 사는 극한 직업이다. 지구를 도망쳐 자신을 받아준 우주탐사우주선에는

자신의 기억을 메모리 칩에 남기고 몸만 계속 프린트되어 우주에서 필요한 생체실험과 죽음을 대신하는 일이 미키를 기다리고 있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영화 내내 미키에게 모든 케렉터들이 묻는다.

보통은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라는 질문보다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라고 물어보는 게

더 어울리지만,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의 기분이 궁금하다.

죽어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없다. 인간이 신비로운 건 단 한 번의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생명이 아름다운 건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키가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이유는 죽음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행성에서의 바이러스실험, 가스실험, 모든 상상할 수 있는 실험이 끝나면

생명을 다한 미키는 소각로로 던져진다. 15분짜리 짧은 실험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우주 괴물크리퍼들에게 먹잇감이 되는 순간에도 미키는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제말 한 번에 나를 먹어줘. 미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영화를 보면서 하게 된다.


복제인간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미키는 우주쓰레기를 재료로

새롭게 프린트되어 인간으로 생산되고, 기억만 이전기억으로 계속 연결 세팅되는 형태의

불교적으로 보면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계속 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내가 만약,

죽었는데, 이전의 몸 그대로 다신 눈을 뜬다고 생각해 보자. 실험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기분이 별로여서, 소각로로 뛰어들었는데, 눈뜨니까 다시 이전의 몸이다.

희로애락도 있고, 심지어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 섹스도 한다.

죽음도 두렵지가 않고,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도 없다.

그런데,..... 미키는 과연 삶에 있어 무슨 문제와 재미 이런 게 있을까?


영화 속 미키는 자유가 없다. 소모품일 뿐이다. 인격체이기는 하지만 죽어야지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 실험을 하다, 아직 생명이 붙어있는데도, 산채로 소각장에 던져지지는 순간에도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미키는 투덜대지 않는다. 미키가 폐기되지 않고, 계속 복사되려면, 언제나 죽음이 괜찮아야 한다.

그래서 미키는 죽으면 죽을수록 더 유순해진다.

자신을 물건처럼 다루는 인간들에게 복종하고, 저항하지도 않는다. 그 어떤 사명감도 없다.

그저 죽는 게 당연할 뿐이다.

생에 대한 애착이 없기 때문에, 절망과 분노 좌절 행복과 기쁨이라는 감정도 모른다. 17번째 죽음은 얼음구덩이에 빠져 가망이 없자, 지하괴물들의 먹이로 남겨두고, 동료인 친구가 떠나 버린다.


18번째로 다시 태어난 줄알 고 미키 17이 정신을 차렸을 때 미키는 죽지 않았다.

자신을 얼음굴 밖으로 굴려 살려준 우주괴물들에게 소리친다. 왜 날 먹지 않은 거야? 내가 계속 프린트되어 아무런 맛이 없어진 건가 아무 맛이 없어 날 구덩이 밖으로 버린 게야?


그렇게 살아 돌아왔는데도 어리둥절할 뿐이다. 괴물들이 자신을 먹지 않은 이유만 궁금할 뿐 괴물들이 자신을 살려 주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17번째 죽음이 실패로 돌아가자 오히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진짜 죽음이라는 게 뭔지 모르고 사는

프린트되는 인생이고, 삶의 기쁨을 잃어버린 인생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살아 돌아온 미키가 우주선에 돌아와 보니 자신과 똑같이 생긴

미키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동침한 상태로.

그때 미키는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모든 인간의 감정들을 다시 찾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관심 있어하는 부분에 꽂히기 마련이다.

미키 17에서 흥미 있었던 건 미키가 인간으로서 각성해 가는 과정이었다.

새로 프린트된 미키 18을 본 후 자신의 삶이 빼앗길까 봐 두려워한다.

단 하나의 미키만이 존재해야 하는 우주법에 따라서 자신의 생존권을 지켜야 했다.


사랑에 눈을 뜨고, 자신이 당했던 모든 비 윤리적인 대우들 그리고 계급이라는

구조속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된다.


우주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미키는 탐사대의 일원이지만, 소모품이고,

인간사회의 구조는 자신의 노동과 생명을 교환하여 하나의 계급만을 살찌우고,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지속적으로 이용될 뿐이다.


그동안 수동적으로만 살았던 미키 17은 미키 18을 통해 능동적인 삶을 찾게 된다.

부속품처럼 사용됐던 생명이 아닌 자기 자신의 것이며 존중되어야 한다는

자각을 한다.


이 영화도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각자의 특별한 가치를 찾아 헤매는 여정을 담고 있다.


미키 1 미키 2라는 이름대신 미키반스라는 자신의 이름을 찾아

자신의 인간성을 되찾는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그 누구도 함부로

이용되어서는 안 되며,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실존이 이영화의 핵심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 속

노동자이다.

우리의 인생도 미키의 축소판이다.

매 순간 죽을 만큼 힘든 현실 속에서 늘 언제나 마주하게 되는

고통들을 알면서도, 우리는 매일매일 아침에 미키처럼 프린팅 되어 눈을 뜬다고도 할 수 있다. 노동자가 겪는 고통을 자본가는 생각하지 않는다.

매달 월급날이 오면 우리는 부활한다. 계약서를 쓰면서 매일 죽는 기분은 어때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통장에 찍힌 급여는 누군가에게는

이 맛에 내가 죽는 거지라고 짜릿해하기도 하지만 내 죽음의 대가가 겨우

요거밖에 안돼 라며

진짜 죽지도 못하고 계속되는 비참한 일상의 반복이다.


우리를 이런 죽음의 지옥에서 탈출시켜 줄 구원자는

누구일까? 영화에서 처럼 사랑일까!

아니면 새롭게 각성해서 나를 위해 희생하는 또 다른 나 미키 18일까?


현실에서의 나는 프린팅 되지도 않고,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매일매일 불안으로 살고 있다. 다행인 건,

나 혼자가 아닌 이런 인간들이 지구에 전부다라는 사실이다.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게 산다.


그리고, 인간이 자각할 수 있는 건 특별한 인간이라고

스스로 의미를 찾으며, 다르게 살기로 선택한다.

적어도 자살하지 않을 이유 한 가지 정도는 가지고 산다.


그 어떤 목적으로 프린팅 되지 않고

나라는 실존으로 스스로를 프린팅 해서 새롭게

매일매일을 주체적으로 살기를 선택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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