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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play Nov 12. 2023

게으른 세탁 ⁀ 패딩

겨울이 시작되자 겨울 옷을 빨았다.

어제까지만해도 분명 가을이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한낮에는 따뜻하고, 

일몰이 시작되면 그제야 좀 서늘했었다. 반팔 옷이나 얇은 긴 옷에 바람막이 하나 걸치면 되는 정도.

가볍게 가을을 서성이다 일몰이 조금씩 빨라지면 겨울의 골목에 다다른 것이다. 

이번 주 오후 6시까지 버티던 해는 5시 반으로 해넘이를 앞당기더니, 

입동을 맞아 기온을 뚝 떨어뜨렸다. 이른 감이 있지만 이미 겨울에 도착해버렸으니 무를 수도 없다. 


겨울의 골목에 들어서기 전에 두꺼운 옷을 챙긴다. 오랜만에 패딩을 꺼내 입었다. 

매년 반복되는 환복인데 첫 날은 항상 설레고 낯설다. 그러다 무심코 손을 넣은 주머니에 뭔가 잡힌다. 

돈인가? 기대하며 꺼내보니 마트 영수증이 버석거리며 나온다.

<애호박, 두부, 과자. 7000원.>     


내가 이 패딩을 빨지 않았구나’ 라는 현실적이고 찝찝한 생각은 접어두고, 지난 겨울의 흔적을 곱씹는 낭만적인 시간을 보낸다. 패딩 속 영수증에 담긴 시간을 헤아린다. 새 겨울을 앞두고 지난 겨울을 복습한다.

겨울바람만큼 날이 섰던 영수증은 패딩 주머니에서 몸을 충분히 녹였는지 구깃하고 흐릿했다. 주머니에서는 돈 대신, 돈을 썼다는 영수증이 몇 개 더 나왔다. 그리고 새 겨울의 영수증이 하나 더 포개졌다.   


집으로 돌아와 옷장에서 모든 패딩을 꺼내 주머니를 턴다. 아이 패딩 주머니에서는 분홍색 비타민 사탕이 나왔다. 겨울동안 뻔질나게 드나들던 소아과에서 받은 게 분명하다. 반대로 남편과 내 패딩에서는 아이들이 먹은 사탕 봉지가 나왔다. 비닐에 싸인 먹다 남은 소세지도 나왔는데, 잘려나간 부분이 시커멓게 변해 있어 충격이었다. '이런 걸 주머니에 뒀다니.' 

뜻밖에 침이 닿은 음식을 실온에 보관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확인했다. 

올겨울에는 감기에 덜 걸리길 바라며, 

먹다 남은 음식물을 주머니에 넣어놓지 않길 다짐하며 

겨울의 잔해물을 식탁 위에 놓았다. 


하얀, 길고 둥근 식탁 위에 지나간 겨울이 나뒹군다. 열어둔 주방 창으로 바람까지 불어오니 순식간에 식탁은 눈밭이 된다. 물건값이 제대로 계산되었는지, 빠지거나 더해진 것은 없는지 확인하고자 꼼꼼히 봤을 영수증은 이제 쓰레기가 되었다. 코를 훌쩍이며 나온 아이가 받고 신나 했을 비타민 사탕도 마찬가지다. 


나는 눈밭 위의 쓰레기를 서둘러 치우고, 바닥에 널브러진 패딩을 본다. 추억이 털린 패딩들이 왠지 더 초췌해 보인다. 모든 지퍼를 꼭꼭 잠궈 세탁기 안으로 치운다. 울코스로 58분이 뜬다. 58분 뒤에는 건조기에 넣어 절반만 건조하고, 건조대에 비스듬히 널어 말릴 것이다.

       

58분 뒤.  

    

겨울내내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하던 패딩이 마침내 건조대에 누웠다. 서서히 건조되면 황태만큼 부드러운 패딩이 될 것이다. 마음만은 겨울 바다 앞이었다. 비스듬히 누운 패딩이 바닷바람에 흔들린다. 

마치 내가 입고 누워있는 것 같다. 겉은 차갑고 속은 따뜻한 패딩이 끊임없이 얼고 녹는다. 

나도 그렇다. 봄, 여름, 가을 동안 녹았던 나는 이제 얼 차례다. 


푸르고 하얀 바닷가 마을을 떠올린다. 나는 빨랫줄에 꼿꼿이 매달려있다. ‘춥고 무서워.’  

매서운 바닷바람에 꽁꽁 얼었다가 겨울 햇빛에 녹기를 반복한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겨울 햇빛의 시간을 즐기고 매서운 바닷바람의 시간을 버틴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부드럽고 굳건해진다. 상상 속 나는 마침내 빨랫줄에 아주 유연하게 매달려 있다. 

       

오늘은 일몰이 더 빠르다. 겨울로 가는 길에 속도가 붙는다. 

'내일 입어야 되는데.' 

건조대에 누운 패딩을 만져보니 영수증처럼 버석거린다. "잘 말랐네." 

옷걸이로 잘 마른 패딩을 두드린다. 이렇게 하면 패딩 안에 숨이 죽은 털이 살아난다. 

뜻밖에도 나는 패딩을 혹독하게 담금질하고 있었다. 잠시 뒤, 잘 부풀어 오른 패딩을 옷장에 넣는다. 

내일, 우리는 부드럽고 굳건해진 패딩을 입고 겨울 속을 걸을 것이다. 이만하면 눈보라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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