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AI 전문 뉴스레터 '튜링 포스트 코리아'에 게재한 글의 일부입니다. AI 기술, 스타트업, 산업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이 있으시면 '튜링 포스트 코리아' 구독해 주세요.
튜링 포스트 코리아의 FOD#111에서, AI 주도권을 둘러싸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국가 간의 경쟁’이라는 내러티브가 얼마나 위험할 정도로 ‘단순화된 프레임’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죠.
AI는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이고, 정치적으로 큰 함의를 가지기도 하고, (당연하지만) 경제적인 영향도 아주 큰 기술이기 때문에 ‘단순한 승부의 구도’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경쟁의 끝에 다다르게 될 결승선 그 너머 생각을 해 보면, 더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는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실제로 만들어가고 있는 세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리고 그 새로운 경제 체제 속에서 ‘좋은 삶(Good Life)’이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 번 용감하게 상상해 본다면, 그건 어쩌면,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보다는 오히려 먼 과거의 어떤 모습과 닮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 바로 귀족정(貴族政; Aristocracy) 말이예요.
뜬금없이 귀족정인가 하시겠죠?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귀족정’은 ‘혈통, 토지, 그리고 억압에 기반한 전통적 의미의 귀족제’는 아닙니다. 인간의 정신에 기반한 귀족정이고, 인간이 아닌 노동력(Non-human Workforce) 덕분에 모두가 접근 가능한 형태의, 새로운 귀족정입니다.
‘봉건제’의 맥락을 제거하고 ‘귀족적 삶(Aristocratic Life)’의 역사적인 정의를 한 번 떠올려 보세요. 그건 노동의 필요에 쫓기지 않는 삶, 오히려 노동으로부터의 자유가 보장되는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타인의 노동 덕택에 제공되는 풍부한 자원 속에서, 교육, 예술, 철학, 정치 담론, 자기 수향을 위한 시간과 공간이 주어졌습니다. 당시 귀족의 삶이란 건,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의미있는 삶을 살고, 사회에 기여하고, 지적인 한계를 확장해 나가는 게 그 목적이었습니다. 물론, 수천년 간 이런 삶의 형태는 본질적으로 아주 ‘배타적’이었죠 - 극소수의 사람들을 위해서 다수를 억압해야만 유지할 수 있는 구조였으니까요.
어쩌면 AI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풍요의 구조는 다수에 대한 노동의 억압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그 어두운 공식을 깰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가져다 줄 지도 모릅니다.
펜실베니아 대학 워튼 스쿨의 교수인 Ethan Mollick은 최근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 “AI 영역의 리더들이 2035년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그때의 일상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또는 SF 소설같은 이야기라도) 같은 걸 정말 보고 싶습니다.”
Ethan Mollick 교수가 한 번 상상해 볼 만한 그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AI와 로보틱스가 새로운 글로벌 경제의 기반이 되는 미래죠. AI와 로봇은 지치지 않는, 감정이 없는(Non-Sentient; 꼭 감정이 없어야 하느냐 등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노동력으로서 밭을 갈고, 공급망을 관리하고, 제품을 설계, 생산하고, 질병을 치료합니다. 이 미래에서는, 이들이 만들어낼 ‘압도적인 풍요’가 소수의 기술 재벌들이 독점하는 게 아니라 공공의 유틸리티(Public Utility)로서 인류 전체의 공동 유산으로 간주되는 거죠. 물론 이상적(Ideal)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이런 세계가 올 수 있다면, 인간의 ‘직업’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요? 일단, ‘직업’이 ‘생존’과는 명확히 분리가 되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노동, 즉 주당 40시간을 임금을 위해서 일하는 의무는 더 이상 삶의 중심에 있는 원칙이 아니게 된다는 겁니다. 대신에, 그건 일종의 소명(vocation)이 될 수 있겠죠. 사람들은 전기 기술자, 과학자, 돌봄 노동자, 엔지니어, 지역사회 봉사자 등이 되는 걸 ‘선택’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일이 자신에게 의미를 주기 때문에요. 개인적으로 모든 직업이 무조건적으로 그럴 수 있거나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열정을 수익화(Monetize)’해야 한다는 압박이 어느 정도라도 사라지게 된다면, 더 깊고 진정성 있는 몰입이 가능해 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육’ 역시 크게 변화해야 할 겁니다. (다분히) 순종적인 노동자를 길러내기 위해서 설계된 - 물론 이것도 그 시대의 소명이었고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공장형 교육 모델(Factory Model of Schooling)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될 겁니다. 그 자리를 AI 기반의 개인 튜터, 즉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같은 안내자가 대신하게 됩니다. 이 시스템은 표준화된 시험을 치르기 위한 준비를 시키는 게 아니라,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각자 개인의 고유한 잠재력에 맞춰서 호기심, 비판적 사고, 독창성을 길러내는데 집중합니다.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런 비전 — 앞서 말씀드린, ‘모두를 위한 귀족정’ — 은, 그냥 기다리고 있으면 다가올, 예정되어 있는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고 만들어나가야 하는 하나의 가능성일 뿐입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방향과는, 사실 아주 극명하게 대비되는 길입니다.
지금 우리가 떠내려서 따라가고 있는 길로 그냥 가다 보면, 오히려 AI는 디지털 봉건주의(Digital Neo-Feudalism)라는 결과물을 낳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수의 엘리트가 모델을 소유하고 통제하고, 대다수는 디지털 오락과 최소한의 생필품에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은 전혀 발휘되지 못한 채 남겨지는 구조 말입니다.
‘모두를 위한 새로운 귀족정’, 이 야심찬 목표를 선택하고 나아가려면, 우리가 현재 발딛고 있는 사회적·경제적 계약 구조를 근본적으로 다시 상상해 봐야 합니다. AI가 만들어내는 부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에 대한 시스템 설계가 필요하구요 — 예를 들면, 보편 기본 소득(Universal Basic Income), 기초 모델의 공공 소유(Public Ownership of Foundational Models), 또는 아직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다른 방식일 수도 있죠. (제가 보편 기본 소득, 기술의 공공 소유 등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어요)
하지만 제가 느끼는 가장 큰 걸림돌은, 사실 ‘정책’이 아닙니다. 제 고민의 지점은, 인간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 심지어는 과연 인간이 스스로에게 개인으로서의 진정한 자유를 가지고 싶어하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여전히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의문의 ‘일부’는 물론 우리가 여전히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갇혀 있다는 점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지난 수백년 동안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경제적 생산성과 동일시해 왔고, 자신의 정체성을 내가 갖고 있는 직업의 이름과 연결지었고, 사회적인 계층과 사다리에서의 위치로 스스로를 정의해 왔기 때문이죠.
이렇게 우리의 몸과 마음에 깊이 뿌리내린 사고방식을 어떻게 바꾸기 시작할 수 있을까요?
명확한 건, 그 시작을 소위 ‘정부의 명령’, 그리고 정책, 규제 같은 것에서 찾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이야기(New Story)를 만들어야 합니다: 인간의 가치와 시장 가치(Market Value)를, 적어도 지금처럼 딱 붙어 있는 상태로부터 분리시키는 내러티브를 말이죠.
그리고 ‘공헌(Contribution)’, ‘호기심(Curiosity)’, ‘돌봄(care)’과 같은 가치를 ‘잘 살아낸 삶’을 뜻하는 새로운 기준으로 삼도록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 솔직히, 이런 변화가 가능한지도 모르겠어요 ^.^; 어쨌든, 이런 변화는 ‘탈노동(Post-work)’ 프로젝트를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지역 사회에서, 표준화된 교육 과정을 폐기하고 창의성과 시민적 덕성을 기르는 모델을 도입하는 학교에서, 그리고 우리 스스로와 자녀에게 성공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는 개인의 삶 속에서,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서 오랜 시간, 점진적으로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쌓이면서 만들어질 겁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 이전에, 먼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 번 해 보세요: 당신이, 다른 사람 말고 당신이, 세상의 모든 돈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계시다면, 당신 주변에 이미 수없이 많이 있는 AI 기술과 도구들을 활용해서 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됩니다.
이 변화, 이거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짜 도전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새로운 형태의 지능(Intelligence)을 이용해서, 그냥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세계를 단지 더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재편하는데 몰입할 수도 있을 겁니다 - 그 세계의 불평등한 현상은 더욱 더 심화되는 채로 말이죠.
아니면, 이 지능을 활용해서 수천 년 동안 우리 모두, 우리 인류를 억눌러 온 고된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잘 살아가는 삶을 추구한다’는 걸 소수의 특권층만이 아닌 모두의 권리로 만들어보자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겠죠.
모두를 위한 귀족정(Aristocracy of All), 저는, 우리의 손이 닿는 거리에 있다고까지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 이걸 새로운 목표로 삼고 이전과는 다른 시도를 해 볼 만은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유일한 질문은, 모두가 과연 정말 유연하게 우리의 사고방식을 전환할 수 있느냐는 것 같습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은, 스스로의 생각, 사고방식, 철학의 전환이 가능할 것 같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