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혼자 떠나는 여행, 스리랑카로 향했다. 스리랑카 여행을 하면서 매일 단 한 순간도 도움을 받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물론 콜롬보에서는 사기도 몇 번 당했지만) 스리랑카 사람들은 친절하고 호의적이다.
이번 여행길에서 예전보다 한층 너그러워진 자신과 마주한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니하오, 곤니찌와로 날아오는 인삿말과 호객꾼들의 호객 행위를 차단하기 위해 그들의 말에 대답없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곤 했다. 문득 이런 무응답이 상대방에게 '무시'로 닿게 된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번에는 니하오에는 헬로로, 호객 행위에는 정중한 거절로 응답을 하니 상대방 얼굴에는 미소가 번지고 존중의 마음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사람은 크고 작은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가고, 이 상호작용이 진심과 존중으로 이뤄진다는 건 멋진 일이다.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나간 갈레 포트 위에서 높게 솟은 시계탑을 옆에 두고 찬찬히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면서 뙤약볕에 어깨가 발갛게 달아오름을 느낀다. 왼쪽 시선이 시작되는 곳에서 오른쪽 시선이 닿는 곳까지 넓게 펼쳐진 인도양은 발 가까이는 놀랍다리만큼 투명하고, 저 너머 수평선은 하늘과 맞닿아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구름을 걸치고 있다. 사방에서 스미는 축축한 공기에 속옷까지 젖어 버린 지 오래, 이제는 이 습한 더움을 받아 들이기로 한다. 분명히 배가 고파 구멍가게에 들러 로띠와 미지근한 콜라를 사서 먹을 장소를 찾아 다니던 길이었는데, 이국적으로 생긴 새들과 하늘로 쭉 뻗은 야자수 나무들과 정교하게 나무를 깎아 만든 에메랄드 빛의 대문들은 허기도 잊을 만큼 시선을 잡아둔다.
바위에 붙어 있는 해초를 뜯어 먹기도 하고, 파도가 하얗게 부서질 때 파도를 타며 우아하게 손발을 내젓다 얼굴도 물 밖으로 이따금씩 내밀어 보는 바다 거북이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숙소 주인 아나에게 메시지가 왔다. 친구의 친구의 딸의 big girl party (여자아이의 첫 월경을 기념하여 지인들을 초대) 가 있는데 오늘 별 일정이 없으면 함께 가지 않겠냐는 메시지였고, 이미 갈레로 나와 버렸다고 하니 점심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온다고 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베지터블 로띠(스리랑카 음식은 진짜 맵다)도 먹고, 기념품 가게 직원의 열띤 한국 드라마 사랑도 듣다가 약속 장소인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 중심에는 커다란 반얀나무가 수 천개의 줄기를 내려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는 양 서 있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나무 방향으로 다가오는 중년의 서양 여성은 눈이 마주치자 커다랗게 미소를 짓고는 자전거에서 내려 나무로 향했다. 그녀는 마치 매일 행하는 의식인 것처럼 편안하게 그리고 익숙하게 양 손으로 줄기를 하나씩 움켜 쥐고서는 매달리듯 서서 한참을 그렇게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녀의 행동 하나 하나를 낯설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녀를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하늘색 점으로 표시된 그의 위치가 점점 가까워진다. 두 블록 후... 한 블록 후... 왼쪽 모퉁이를 돌면 바로지만 솔직히 말하면 어제 잠깐 본 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가 자동차를 운전해서 오는지, 툭툭을 타고 오는지도 가늠할 수 없다. 아마 내가 여기서 유일한 동양인이니 그가 나를 알아볼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온 아나가 나를 발견하곤 활짝 웃는다. 따뜻한 웃음.
한참 시골길을 달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길이 너무 복잡해서 열 번은 넘게 물어봤다) 도착한 곳에는 초대된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신나는 음악 소리가 흘러 나오고 초록색 공주 드레스를 차려 입은 오늘의 주인공 12살 소녀가 손님들을 맞고 있다. 맛있는 음식과, 스스럼 없이 대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자고 난리인 꼬마 아이들과, 동행한 아나와의 대화에 마음은 어느 때보다 풍족하다.
엘라의 밤하늘은 별로 가득해서 잠도 안 자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고 하니, 별똥별은 봤냐고 소원을 빌었냐고 묻는다. 나는 특별한 소원이 없어서 빌지 않았다고 했더니, 다음 번에 별똥별을 보면 꼭 소원을 빌어 보라고 한다. 어릴 때 정말 정말 가난했는데, 별똥별을 보면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고, 그렇게 빌었던 소원이 이뤄졌다면서 아주 잘 살지는 않지만 큰 걱정 없이 살고 있다는 아나는 스무살 때 스리랑카를 벗어나 두바이, 몰디브 등 해외에서 10여년 간 일하다가 스리랑카로 돌아와서 숙소를 운영 중이다. 별똥별에 공을 돌렸지만, 그간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을지를 생각하니 존경스럽다. 삶과 사람에 대한 한없는 긍정을 품고 있는 그는 스리랑카의 삶은 심플하고, 그 심플함을 살아가는 게 좋다고 한다.
계획 없고 갈팡질팡 변덕도 심한 내 여행은 어제 저녁 버스 시간도 갑자기 정하고, 원래는 다른 마을을 가려다가 결국에는 뭔가 애매한 위치에 있는 숙소를 골라 버렸는데, 순간 순간의 선택과 선택이 이런 예기치 못한 만남을 만들어 내는 것도 참 신기하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서 나눈 아나와의 대화에서, 또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사람을 진심으로 대한다는 것에 대해 배운다. 진심은 큰 울림을 가진 마음이고, 그 마음은 상대에게로 전해져 한참을 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