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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어 Apr 09. 2023

인디언 전사

소록도, 한국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마음이 가는 곳을 꼽으라면 그 곳은 그 해 봄과 가을을 지낸 소록도이다. 출퇴근길, 봄바람이 불고 벚꽃이 피었다 지는 길을 걷다가, 잊고 있었던 소록도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이제는 건조해질대로 건조해진 일상과 그 일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소록도는 여전히 눈물샘이고, 행복샘이다.


 소록도는 중앙공원 너머로는 외부인의 발길이 닿지 않아 고요하고 소박한 시간이 흐르고 있는 공간이다. 실편백나무 사이에 불그스름한 손톱달이 뜨고, 산 속 깊숙이에는 사슴 가족이 지내고, 가을이 되면 붉은 왕발게들의 육지 대이동이 펼쳐지는 다채로운 모습을 지닌 이 곳은 나는 살지 못한 시간을 역사로 간직한 채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곳.


 봄에는 병원에서 어르신들을 만나다가 가을에 마을에서 활동을 하게 되면서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아졌고,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름과 목소리를 알아가고 서로를 신뢰해가는 과정이 따뜻했다. 어쩌면 살아오면서 가장 순수하게 마음을 쏟아붓고 아낌없이 마음을 받아들였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살아보지 않은 다른 사람의 삶을 감히 추측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아마도 일생동안 다른 사람들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하였을, 그리고 여전히 어둠 속에서 잊혀지지도 않는 과거를 되풀이하는, 그럼에도 또 여전히 삶의 긍정을 놓지 않는 분들과 보냈던 기억은 언제 떠올려도 특별하다.


 살아 평안하고, 죽음을 앞두어 평안하다는 황ㅇㅇ 할머니의 말에 죽어감에 대한 시선을 배우고, 내 낡은 털고무신을 만지작거리다가 소록도에서 일 년에 한번 씩 받아 모아 놓은 신발 꾸러미에서 (하나같이 270mm 크기인) 가죽 구두들을 뒤적거리다 그나마 작아 보이는 구두 한 켤레를 나란히 내어 놓으시며 하나 신어- 하시던 백ㅇㅇ 할아버지의 마음에 나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간간히 딸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 박자에 맞춰 가늘고 곱게 흘러나오는 김ㅇㅇ 할머니의 연륙교 노래 소리에 마음껏 위로받았다.


 나는 김ㅇㅇ 할아버지가 참 좋았다. 할아버지 방을 방문하면 할아버지 말들에 나는 웃음이 터지고, 할아버지도 웃음이 터지고, 그 웃음에 내 웃음이 또 터져 버렸었다. 보이지 않는 눈과 다 쉬어버린 목소리, 딱딱하게 굳어버린 팔과 무릎까지의 다리를 가지신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사람. 할아버지는 매일 라디오를 통해 세상 뉴스를 꿰고 계시고, KBS 여행 프로그램 세상은 너르다(넓다의 할아버지식 발음)를 보며, 아니 들으며 전 세계 모르는 곳이 없으셔서 아프리카에 대해 이야기해도 마치 함께 다녀온 사람과 수다 떠는 기분이었다. 봉사자들이 와서 방청소를 해줌에도 항상 먼저 방을 정갈하게 정리하시고, 침받이용으로 수건을 목에 야무지게 동여매고 계신 할아버지를 보며 삶을 진심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배운 것 같다.


 소록도에는 아무래도 소록도와 닮아 있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소록도에서 만난 한 소녀는 자신을 인디언 전사라고 소개하였고, 함께 지내다가 아마도 자신과 결이 닮아 있다고 생각하였는지 나를 전사라고 불러줬다. 여담이지만 나를 전사라고 불러주던 이때의 기억이 좋아서 심지어 나는 여권을 만들 때, 내 한글 이름과 발음이 닮아 있는 인디언 부족 이름을 영어 이름으로 등록했다.


 전사는 밝음과 어두움과 순수함이 묘하게 공존하는 친구였다. 전사와의 인연은 소록도를 벗어나서도 잠깐 이어졌는데, 어느날은 그녀가 사는 안성으로 초대 받았다. 그 때도 배꽃이 피어나는 봄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전사는 일회용 우비를 내밀었고, 우리는 하얀 우비를 입고 논밭을 하염없이 걷다가 나무 아래에 누워 비를 맞다가 또 걸었다.


 또다시 아프리카로 떠났을 때, 전사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편지에 작디 작은 나무 조각들이 동봉되어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뭐야 했는데, 장구채 조각들이었다. 전사는 장구를 배우고 있었는데, 장구를 계속 치다 보면 장구채에서 조각이 떨어져 나온다고 한다. 그 작은 조각들을 선물받고 정말 기뻤다. 그 조각 하나 하나에는 전사의 열정과 시간, 꿈, 청춘, 아픔 등 온갖 것들이 담겨 있었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해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소유에 대한 욕구가 크지 않은 사람이지만, 앞으로도 소록도와 어르신들과 전사가 담긴 이 나무 조각들은 버리지 않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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