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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어 May 11. 2023

장갑

모스크바, 러시아

  트빌리시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구다우리 지역에 눈이 많이 내려서 카즈베기까지 장장 6시간이 걸렸고, 멈추어 선 모든 차가 스노우 체인을 감고서야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조지아 국경에서 출국 심사 한 시간, 러시아 국경에서 입국 심사가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그 해부터 체결된 한.러시아 무비자 협정을 국경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터라 공식 협정문을 출력한 종이를 보여주며 미숙한 러시아어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설명을 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 시간 뒤 입국 심사관의 '아가씨, 가도 좋아요! (девушка, you may go!)' 하는 한 마디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버스의 모든 승객들이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아 국경까지는 눈보라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 러시아로 넘어오니 비가 내렸다. 간간히 들르는 휴게소에는 소문대로 익숙한 도시락 컵라면이 놓여져 있었고, 전반적으로 무뚝뚝했던 조지아 사람들과 달리 가게 아주머니, 화장실 지킴이 할아버지 등 만나는 사람들마다 친절해서 누그러진 날씨만큼이나 마음도 누그러졌다. 러시아 국경에서부터 30시간 동안 끝도 없는 평지를 달려 모스크바에 도착하니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중동에서 갓 퇴사를 하고 떠나온 여행이라 가진 옷 중 가장 따뜻한 옷(이라고 해봤자 무술 선생님이 러시아에서 얼어 죽지 말라고 선물로 준 얇은 갈색 외투)을 입고 오긴 했지만, 3월 초 모스크바는 잔인하고 혹독하게 추운 곳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무슨 무모함이었는지 그 추운 겨울 밤을 구글 지도에 의지해서 하염없이 걷다가 찾아간 숙소는 당연히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마땅히 갈 곳도 없어서 최대한 몸을 웅크려서 아침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마침 라트비아 대사관이 옆에 있었는데, 추위에 떨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경비원이 끼고 있던 까만색 두툼한 장갑을 건네 준다. 지마라는 이름을 가진 이 청년은 동갑내기였고, 추워하는 나를 비밀(?) 직원 숙소 건물로 안내하고서는 복도 의자에 앉히더니 옷과 따뜻한 차를 가져다 주었다. 그럼에도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추운 밤이었지만 지마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며 추위를 녹여 주려 애썼다. 낚시를 좋아해서 고향 마을에 자주 간다는 이야기, 누나와 캄차카 반도에 낚시를 하러 갔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여행 사진들을 보여주며 따뜻한 시간을 만들어 주려는 그 마음씨가 고마워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새벽과 가장 따뜻한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감사와 작별 인사를 건네고 헤어질 때, 지마는 여행하는 동안 쓰라며 손에 장갑을 쥐어줬다. 


 지마의 장갑을 끼고 나면 오른손에 담배 냄새가 진하게 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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