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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어 Feb 25. 2024

회상

flashbacks

카리부


탕-


하고 총알이 날아가는 소리는 땅으로 저항없이 쓰러지는 무거운 소리와 흩날리는 새하얀 눈발, 짙고 희미하게 흩어지는 피와 어우러져 결국에는 회색으로 세상을 물들인다. 실제로 흐른 시간은 단 몇 초였을지 모르지만 시간은 절대 절대적이지 않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나와 눈을 마주치던 그 시간은 적어도 나에게는 수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고, 어느 순간은 멈춘 것 같기도 했다. 새하얀 눈밭이 반사되어 희미하게 번지는 서로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는 시간 동안, 나는 공평하지 않은 관계로 손에 총을 든 비겁함과 죄책감, 불안, 손이 덜덜 떨려 몇 번이나 총을 놓칠 정도로 격렬한 두려움을 내뿜으며 땅 위에 바짝 엎드려 있었고, 그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뒷걸음질치거나 달아나 버리지 않고 그저 가만히 발걸음을 멈춘 채 고요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신의 마지막 살아있는 순간에 '자신이 그 자리와 시간에 존재함'을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듯해 보였다. 


"샨! 이리와."


어느새 아버지는 쓰러져 있는 카리부의 가슴을 칼로 찢고 계셨다. 


"만져보거라. 심장은 죽음을 늦게 받아들인단다."


아버지는 나의 손을 카리부 심장의 위와 아래에 나란히 얹게 하고선 생명이 가진 무게에 대해, 그의 유한한 삶에 대해, 우리의 삶도 그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셨다. 우리는 카리부가 마지막 순간에 존재했던 그 자리에 땅을 파고 심장을 묻었다. 공기 중 부유하는 먼지마저 얼어붙는 겨울에는 생존하기 위해 최선의 힘을 다해야 한다. 비록 그 최선이 다른 생명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라 하더라도 버티기 위해서 기꺼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언젠가는 나의 죽음을 공유할 수 있는 준비 또한 기꺼이 되어 있어야 하겠지. 그것이 삶의 전부다.





부재


아버지의 부재를 준비한다. 


근래 기침이 심해진 아버지를 위해 평소보다 장작을 더 넣어 방 안 공기의 온도를 높여 두었지만, 여전히 손 끝이 차갑다. 어릴 적 할머니는 매일 같은 식탁 의자에 앉아 카리부 가죽으로 이불을 만들고 계셨다. 카리부의 털은 부드럽다기보다는 다소 굵고 거칠어서 할머니는 카리부의 모피에 그보다는 부드러운 산양의 털을 섞어서 이불을 만드셨는데, 다른 색을 가진 카리부의 털과 산양의 털을 엮는 과정에서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려내고 계셨다. 


"이건 네 아버지를 위한 이불이야. 후잠은 일년 중 한 달 동안만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을 타고 찾아왔단다. 나는 첫 출산이었어. 얼마나 무서웠겠니, 어느 순간에는 내가 품은 생명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 정말 고통스러웠지. 세상의 모든 인내를 끌어 모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어.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내 품에 후잠이 안겨 있었어. 놀라운 게 뭔지 아니? 피투성이의 쭈글쭈글한 작은 생명체는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버둥대다가 어느새 고요하게 잠들었는데 아이의 심장 소리는 우주의 진동 같았단다. 그 자그맣고도 확신에 찬 진동을 느끼는 순간 몇 시간의 진통에 고통스러웠던 사실이 더이상은 사실이 아니게 되었어."


할머니는 아버지를 처음 만났던 그 여름의 바람과, 우주 그리고 진동을 의미하는 문양을 엮고 계셨다. 


미세하지만 쉬지 않고 떨고 계시는 아버지에게 할머니가 만드신 이불을 덮어드리고 창 밖을 바라보니 쟈미 아주머니가 걸어오는 게 보인다.


"그므룽(산양 고기와 감자를 넣어 만든 스프)을 만들었는데 너무 많이 만들었지 뭐니. 후잠과 함께 먹으렴. ... 준비는 잘 하고 있니? 이렇게 혹독한 날이 몇 주간이나 이어지는 동안에는 늘 헤어짐에 대비해야 한단다. 벌써 우리 마을에서만 두 분이나 돌아가셨어. 후잠과 많은 시간을 보내거라."


며칠 뒤, 평소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신 아버지가 불러 가보니 곁에 앉으라고 하셨다.


"샨,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너와 함께 보낸 17년의 시간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단다. 나에게 너의 존재는 축복 그 자체이지만 늘 너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너는 일 년 내내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는, 사냥을 할 필요도 없는 곳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그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머금은 미소를 가진 삶을 살 수도 있었겠지. 혹독한 이곳의 자연 만큼이나 굳은 너의 얼굴에 강인하게 자리 잡은 눈동자를 보면서 기특하면서도 어쩐지 느껴지는 공허한 시선에 가슴이 아프기도 했어. 혼자 남을 너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훌륭하게 삶을 살아내겠지."


"네가 떠나 버릴까봐 한 번도 말해주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 어쩌면 네가 품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거다."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그가 늘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내가 속으로만 품고 있었던 마음과 감정을 말하지 않았어도 나를 이해하고 계셨음에 깜짝 놀랐다. 어린 시절, 헌신적으로 아버지와 나,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돌보시던 할머니를 보면서, 그리고 생존하기 위해 이 곳 자연의 잔인함을 받아 들이고 또 동시에 맞서며 어떻게 적응해 나가야 하는지 몸소 보여 주시던 아버지를 보면서 그들의 지혜를 배우고 때로는 감탄하며 자랐지만, 늘 궁금했었다. '살아내고 생존하는' 것이 전부일까? 


아버지는 어제 저녁부터 시작된 눈보라가 멎을 때까지 깊은 생각에 잠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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