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비밀스러운 삶
이른 아침 책상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는 여유를 무척이나 정갈하게 짜인 계획표를 따라 하루를 생활하려는 나만의 오랜 습관 때문이다. 빨래를 하거나, 손톱을 자르거나, 마트에서 장을 보는 일까지 일상을 계획 속에 넣고 오늘 해야 하는 일, 이번 주까지 끝내야 하는 일을 끊임없이 점검한다.
“저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냥 하는 스타일이에요. 3초 이상 생각하지 않아요. 여행도 가고 싶으면 훌쩍 떠나요.”
“참 자유로운 생활을 하시네요. 부러워요."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방에게 나는 나를 이렇게 소개하고는 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일정에 맞춰 생활하는 나였지만, 나는 최대한 가슴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필하고 싶었다. 본능적으로 일탈을 꿈꿔왔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게으름이었듯이.
그때 내 머릿속에서 누군가 그렇게 궁상맞게 울상을 지으며 가만 있지만 말고 실패하더라도 일단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충고했어. 당신도 카이로스(Kairos 기회 또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라는 그리스어의 개념을 알고 있을 거야. 요컨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넋 놓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 제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삶이라도 사는 동안 적어도 한 번쯤 운명을 바꿀 기회가 주어진다잖아. 카이로스는 삶이 제공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을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하기도 해. 대체로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순간은 지극히 짧은 법이야. 우리네 삶에서 똑같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으니까.
기욤 뮈소 《작가들의 비밀스러운 삶》
나에게도 3초 이상 고민하지 않을 때가 있다. 카이로스Kairos라고 느껴지는 강한 끌림이 올 때 나는 머리는 끄고 마음을 켠다. 예기치 못한 순간 느닷없이 이런 끌림을 몇 번 느꼈는데, 지금 돌아보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은 순간에 나는 고민을 생략하고 가슴이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공학과 인문학을 복수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도, 유학을 포기할 때도,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도, 퇴직을 결심할 때도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은 접어두었다.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그리고 지금은 직장인에서 잉여 인간으로 살아가는 나의 행보에 주변에서 말들이 많다. 한국과 중국, 프랑스를 날아다니며 생활하는 지금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본 지인들은 부러움, 경외, 시기, 이질감 등 다양한 반응으로 나에게 한 마디씩 한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응당 치러야 하는 고생길에서 열외 되어 부럽다는 시선으로 어설픈 나의 행보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나는 나에게는 없고 그들에게만 있는 삶을 강조하여 말한다. 나는 그들에게 "가장 너 다운 선택을 하고 있다”라고, “이미 아빠가 되었으니 나보다 몇 발자국은 앞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나의 일상을 깎아내린다.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는 꿈꿀 수 조차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삶이 되어버렸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밤늦게 아내와 치맥을 하고, 자녀가 하루가 다르기 커가는 모습을 보고, 그 모습에 힘을 내서 다시 출근하는 일상. 나는 이런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는데 철저하게 실패했다.
그럼에도 누군가 나의 행적을 뒤따라오겠다며 조언을 구하면 이미 늘어놓은 내용으로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는 그 끝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라”라고 말한다. 계산기 두드리지 말고 마음을 켜고 너무 오래 고민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이전에는 ‘하고 싶은 것’을 당장 시작하기를 주문했다면, 하고 싶은 것을 찾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모습에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을 무엇이든 해보라고 조언한다. 결과야 어떻든, 무엇을 새롭게 시도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한 뼘 성장할 기회를 얻은 것이니, 수업료라 생각하고 작게 시작하는 것에 대해 보다 중점을 두어 이야기한다.
대부분은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장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가끔은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충분히 도전을 시작할 수 있음에도 “아직 때가 아니다”, “실패할 것 같다”, “진정 좋아하는 것을 모르겠다”, “후회할 것 같아 두렵다”, “준비가 덜 됐다”며 변화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를 찾아내기에 또 다른 시간을 쏟는다. 나는 그 진짜 이유가 여태껏 이어온 일상의 관성 때문인지, 변화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인지,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번거로움 때문인지 찾기를 이제는 포기했다. 대부분은 현실적 상황을 헤쳐나가야 하기에 도전은 너무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이유가 어쨌든 큰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아주 강인한 끌림을 기다리는 듯 보인다.
하지만 카이로스는 운명적인 사랑처럼 강인한 끌림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첫눈에 반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는 한 청중이 그에게 "어떡하면 당신처럼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냐"는 물음에 그는 매일 10시간씩 30년을 연습하면 된다고 했단다. 음악 천재라고 불리는 모차르트도 음악과 운명적인 만남을 한 게 아니라 음악과의 만남을 운명으로 만들었다.
삶을 변화시키는 기회는 은근슬쩍 찾아왔다가 아무도 모르게 지나간다. 하찮은 선택에 마음을 열어야 하는 이유이고, 사소한 끌림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그것을 못 한다고 했을 때, 후회할 것 같으면 우선 시작하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너무 무겁지 않은 시작일 수록 실패도 짧고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