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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is libris Dec 04. 2020

겨울향冬天香

온 세계가 팬데믹에 빠져있지만 나는 공항으로 향한다. 이전 같았으면 여행객들로 북적일 시간이지만,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유니폼을 입은 몇몇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멀찌감치 지나쳐가고, 여행 가방을 들고 있는 이들은 비행기 시간이 한참 남았는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무료한 시간을 흘려보낸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다.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공항을 활보하는 이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무엇을 먹는 이도,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이도 없어 유일하게 불이 켜진 커피 전문점도 문을 닫는다. 모든 것이 멈춰 버린 것 같은 적막한 공기만 흐른다.

분명 공항의 향기가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각양각색의 향기를 나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공항철도만 타도 맡을 수 있는 향기가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향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마스크를 쓰면서 일상에서 맡을 수 있는 향기에 둔감해졌다. 계절이 변할 때마다, 시장에 갈 때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때의, 그곳의, 그 사람의 향기가 있는데 제법 오랜 시간 동안 그 향기를 맡아보지 못한 것 같다. 마스크 안에는 내가 뱉은 숨 냄새와 손에는 알코올 냄새뿐이다.

하늘이 너무 높아 집 근처 산으로 산책을 갔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솔잎 향기, 나뭇잎 냄새, 흙냄새를 기대했지만, 소금을 넣지 않아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무염식처럼 붉게 변한 가을 산에서 아무 향도 맡을 수 없었다. 시원하게 마스크를 벗고 숲 속을 산책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커피 향기가 하루를 시작하는 향기라면, 말끔한 비누 향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향이다. 시원한 비 냄새가 여름이 왔음을 알려주고, 새콤한 귤의 향이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린다. 그리고 곧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리라는 것도.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올해는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올해 초에 세웠던 새해 결심을 다시 펼쳐 본다. 퇴직, 출간, 이사, 운동, 공부, 여행 등 기대에 찬 계획들이 적혀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목표대로 실천한 항목이 거의 없다. 올해는 유독,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 이유는 무엇일까? 향기를 잃어버려서 그럴까? 올해 한 해를 잃어버린 것 같은 아쉬움이 밀려온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는 외출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잃어버린 게 단순히 계절의 향기만은 아닌 듯싶다. 누군가는 시간을 잃어버렸고, 누군가는 희망을 잃어버렸다. 어떤 이는 목표를, 또 다른 이는 일터를 잃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도, 소중한 일상을 잃은 이도 있겠지?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는 귀에 익은 말을 떠올려 본다.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미건조한 하루를 보내는 주변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시시콜콜한 짧은 한 문장이 날카롭게 날아와 가슴에 박힌다. 잔인하고 차갑다.

낯선 이국땅, 이곳도 마스크 때문에 아무런 향기도 맡을 수 없다. 동네 시장에서 귤 한 바구니를 샀다. 두꺼운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오른쪽 팔목에서 귤 한 바구니가 부스럭 소리를 내며 따라온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귤 한 바구니는 나에게 겨울의 향기를 선물해 줄 거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입 안에 침이 고인다. 오늘 저녁에는 귤을 먹으며 귤 향기가 묻어있는 손으로 내년 계획을 세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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