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일의 시간을 버리는 선택을 하는 법에 대하여
"우린 끝났어. 일어나."
자던 그를 깨웠다.
정말 조상신이 도운 발견이었다. 오랫동안 우편함에 묵혀져 있던 자동차 속도위반 딱지, 수상했던 위반 날짜와 시간. 우리의 지난한 카톡을 뒤져보니 이미 나에게 잔다고 한 이후였던 게 킬링 포인트였다. 하지만 별일 아닌 척 잠들었고, 그가 잠든 후 본격적으로 맘 편히 뒤진 문자 내역에서 나는.. 망할 마사지 업소 예약 내역을 찾았다.
"처음 아니지?"
자다 일어나 비몽사몽 했던 그는 진실을 이실직고했다.
"어, 아니야."
"그럼 더 이상 우린 할 말 없네, 나 갈게."
나를 만났던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3, 4번을 다녀왔고, 직접적으로 '그런 적'은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와 함께 그날 나는 정말 '결혼까지 생각했던' 그 사람에게 이별당했다.
그날 이후로 이제 80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D + 16시간
쿨하게 돌아서 나온 그의 집이 무색하게 나는 다음날 무너졌다. 3~4시간을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인체의 신비를 그때 배웠다. 결국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나에게 왜 그랬어야 하는지 묻기 위해서. 하지만 사실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미안하다'는 말만 메아리처럼 되돌아왔고, 답이 돌아올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이유를 물었다. 1000일을 넘게 만났는데, 나는 사실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회사 계단 한구석에서 이 사실을 깨닫자 나 스스로가 너무도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제까지 나는 뭘 보고 이 사람을 사랑했던 걸까.
친한 친구들에게 정황을 알렸다. 일이 바빠 뛰어다니면서도 틈틈이 전화를 받고 울었다. '진짜 나쁜 놈이네' '와, 진짜 그럴 줄 몰랐다'는 친구들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로 울기만 했다. 나도 정말 이럴 줄 몰랐는데..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막연했고 두려웠다.
D + 3일
내내 울면서 지내서인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퍽퍽한 눈을 한 채로 그를 만났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은 사람 앞에서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정말 하염없이 울었다. 쌍욕을 하면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람이 아닌 나를 때리면서. '사람이 어떻게 이래' 넋두리하듯 이야기하며 나를 쳤다. 아무리 물어도 여전히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고,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를 사랑하긴 했는지' '나를 기만하면서 기분이 어땠는지' 끊임없이 물었다. '나 지금 상처받았다'는 감각이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D + 7일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 그나마 많이 잠잠해졌지만, 드문드문 계속해서 울컥했다. 그때마다 키보드 워리어가 되었다. 쌍욕이 담긴 톡을 끊임없이 그에게 날렸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나랑 결혼하자고는 왜 했어 그럼?' '나를 사랑한 적이 있기는 해?' 그때마다 메아리처럼 '미안해..'라는 말이 돌아왔지만 아무것도 나아지진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내 가슴을 쳤고 가슴 부분은 너무 세게 쳐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아팠다. 많이.
D + 14일
2주가 지나자 어쩔 수 없다는 감각이 나를 지배했다. 하지만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었다. 억울했다. 나만 망가진 느낌. 이 사람의 인생에서 나만 쏙 빠지면, 모든 게 다 없던 일이 될 것 같았다. 나에게는 없던 일이 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보는 앞에서. 내가 나아질 때까지 내 옆에서 위로해 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2를 듣다, 내가 나아지려면 복수를 해야 할 것 같고 전화를 드려야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번호를 넘겨줬다.
"어머니, 기분 나쁘실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해드려야 할 것 같아요.."
"방금 이야기 들었다... 미안하다..."
어머니께서 미안해하실 일이 아닌데, 그걸 아는데도 그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나랑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아도 어머니는 평생 이 사람이 업소 다녀온 걸 기억하시겠지 싶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이 사람의 부정을 영원히 기억할 거라는 사실이 안도되었다.
하지만 정말 웃기게도 이날, 그 사람은 나에게 '계속 만나면 안 될까?'라며 물었다. '엄마한테도 말했잖아, 우리 그냥 만나자. 내가 너 주변인들한테 다 돌아가면서 사과할게.' 웃기지도 않았다.
아무리 고민해도 여전히 내 답은 '안돼'였다. 길가에 널려있는 마사지 가게의 '마사지'라는 단어만 봐도 내 마음이 요동쳤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그 안에 있었을 그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잘 생경하게 그려졌다. 행복했겠지, 좋았겠지, 설렜겠지, 젠장.. 새로운 여자를 그리지 않는 남자라는 건 세상에 없는 걸까 싶었다. 여자를 사람으로 보는 남자란 건 없는 걸까.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을 내 파트너로 인정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인간이니까 인간을 만나야 하는데, 저 사람을 인간으로 인정하면 나는 인구의 절반을 믿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35억 인구를 믿을 수 없는 삶, 너무 끔찍했다. 이 사람은 인간 이하의 무언가가 되어야만 했다. 사람다운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다시 만나는 일 따위는 일어나서는 안 됐다.
D + 21일
이후로도 복수는 계속됐다. 틈만 나면 욕을 했고, 막말을 했고 막 행동을 했다. 뜬금없이 불러내서 막 욕을 했고, 나를 위한 건강검진을 받겠다며 돈도 받았다. 부모님에게 말하고, 돈도 받고, 욕도 하며 원 없이 분풀이를 하니 점점 울며 밤을 지새우는 날은 전에 비해 줄어들었다. 평균 수면 시간이 4시간을 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여전히 '언제 나아질까' 나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도, 눈물이 났다.
그래도 이때부터는 고민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나에 대해서. 언제까지 복수해야 이 감정이 끝이 날까, 이렇게 저 사람을 죄인처럼 옆에 두고 있는 것이 과연 맞을까, 고민했다. 죽으라고도 하고 죽고 싶다고도 하는 이 생활을 지속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이 상황을 좋게 만들어보자, 아니 그나마 좀 덜 나쁘게 만들어보자 생각했다.
그래서 연애한 3년 간의 기록이 담겨있는 다이어리를 폈다. 그러자 정말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나는 이 사람의 부정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나는 동안 유난히도 불안해했다. 그가 연락이 안 되던 때에도 항상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받고자 했다. 이전 연애에서도 그랬었나? 고민해 보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다이어리 속에는 나의 불안들이 적나라하게 적혀있었다. 핸드폰을 죽어라 보여주기 싫어했고, 왜 자기 자신을 그저 믿어줄 수 없냐며 나를 타박했던 순간들. 사실 사랑했지만 잘 맞지 않았던 순간들이 너무도 많았다. 하루는 집에 있는다던 그가 몇 시간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아 결국 집에 찾아갔는데 차도, 사람도 없었다. '회사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라는 그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D + 35일
'사실 알고 있었다..!'는 그와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은 내 인생으로 이어졌다. 매일매일 이제까지 나를 스쳐간 인연들이 떠올랐다. 거지 같았던 사람들. 전여자 친구와 술을 먹다 들키고, 나를 만나기 전 썸녀와 계속 카톡을 하고, 틈만 나면 PC방에서 죽치고 살던 그 XX. 그 지난하고 쪼들렸던 시간들. 하지만 그 순간들이 꽤나 밉지 않았다.
뒤이어 떠오른 것이 그 모든 일을 뒤로 한채 계속 잘 살아온 나였기 때문이다. 꽤 잘 살았다. 아무리 남자친구와 개판으로 싸운 다음 날이더라도 이직 면접쯤은 가뿐히 해냈고 아무리 나에게 상처를 줘도 다음날 웃으며 출근했다. 그러자 '오, 나 좀 센데?' 싶었다. 애인보다도 일을, 그리고 나 자신을 더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도 큰 스케일의 배신은 없었지만 시간이 더 필요할 뿐, 나 좀 괜찮겠는데, 이때부터 그런 감각이 되돌아왔다. 이 일을 잘 정리한다면 나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돌연 그 사람을 전면 차단했다. 내가 괜찮아지는 데에 그 사람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어느 날 갑자기 들었다. 그래서 정말 별안간 차단했다. 차단하기 전까지 정말 수없이 많은 지인들이 '얼른 끊어내'라며 나를 독촉했는데, 정말 이별은 어느 날 계시처럼 찾아온다.
그러자 어느 날 그 사람 이름으로 5만 원이 입금됐다. 진짜 어쩌라고. 웃프게도 송금 계좌주명은 글자수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잘못 보낸 것같'으로 다시 되돌려 보냈다. 사실 내 마음은 '너와의 모든 시간을 잘못 보낸 것 같'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 완전히 괜찮아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처럼 울지 않았고 그저 조금 울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운동을 다시 하고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고 시간을 보내니 점차 예전의 나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시간은 그 자체로 약이 되어주진 못한다. 지난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약이 된다. 멍하니 아파하기만 해서는 도저히 나아질 수가 없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생각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우리의 지난 모습에 대해서.
D + 80일
지금은 정말 괜찮다. 여전히 이 일을 떠올리면 착잡한 마음이 들지만 이제는 정말 그가 행복했으면 싶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는 좀 정신 차리고 살았으면 싶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광명 찾듯 계속해서 하나둘씩 깨달아간다. 정말 그와 나는 인연이 아니었음을.. 작고 큰 갈등 속에서도 우리는 인연이라고 믿었지만 인연이었다면 이럴 순 없었겠구나 싶다. 그래서 인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방식도 정말 여러 가지다 싶었다. 그 사람의 부정에 대해서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인연이 아니어서 생긴 불상사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남았다.
이 사건은 이제 내 인생의 해프닝 정도로 남을 것 같다. '얘 전 남자 친구 그랬었잖아~' 시리즈 에피소드 7 정도 될 것 같다. 에피소드 7이 나에게 준 깨달음은 '나는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 그래서 어떤 일이든 나는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만 더 바라보자면, '다음엔 인연이 아니라는 감각에 조금 더 예민해질 것'일 것 같다.
살다 보면 정말 많은 일이 생기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겨낼 수 있는 나만 있다면 어떤 일이 와도 오늘은 또 어제가 된다. 너무나 아팠던 2022년 겨울의 기억으로 미래의 어느 날엔가 또 내가 위로받기를 바라며 지난한 관찰일기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