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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왕성 Aug 26. 2021

에세이_제가 당신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유는


언니, 저는 언니를 언니라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선생님'이라 불렀지요. 그리고 언니는 제가 다닌 직장의 '선배'였습니다.


저는 (과장하자면) 제 나이의 두 배쯤을 산 언니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글쎄, 언니와의 첫 만남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지요. 언니는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커리어우먼이고,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무렵 막내로 들어가 겨우 걸음마를 뗐으니 언니가 높아 보이고 동시에 멀어 보이는 거리감은 당연했지요. 그런 언니가 어느 저녁 저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제가 쓴 글이 무려 '훌륭하다'고, '깜짝 놀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쩜, 저는 이때부터 언니를 특별히 사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한 특급 칭찬 때문이 아니라 까마득한 후배에게 진솔한 마음을 아끼지 않는 그 올곧음에, 미루지 않고 곧장 마음을 전해주는 따뜻함에 그만 물들고 말았던 거지요.


저는 그때부터 언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그리고 마침내 언니와 친해지는 데 성공합니다. 언니는 모르시겠지만 언니를 제 사람으로 만드는 데엔 다 저만의 계획이 있었는데, 저는 언니가 그것을 평생 모르길 바랍니다.


매일 저녁 언니와 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시기 우리가 무척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아주 쓸데없는 이야기였지만, 저는 그 시절을 쓸데없는 이야기 덕에 살았으니 영 쓸모없진 않았습니다. 음정과 박자 어느 것 하나 맞는 게 없는 언니의 가혹한 노래에, 이유 없이 핑그르르 돌면 긴 치마가 나풀거리는 그 모습에 기대어 1년을 넘게 끔찍한 배경들을 버텼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밤, 언니는 저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 밤 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껏 저는 저 자신을 혐오하며 살고있을지 모릅니다. 언니 덕분에 저의 연소(年少)함을 업신여기는 이들에게 결코 굽히지 않았고, 그 떳떳함은 저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언니, 20대인 저에게도 40대인 언니에게도 삶은 차별 없이 냉혹한 것 같습니다. 인생이란 왜 이 모양일까요? 왜 점점 나아지는 게 아니라 나이대에 꼭 맞는 어려움이 늦는 법도 없이 문을 두드리는 걸까요? 저는 그 모질음에 맞서 싸우기도 하고, 어느 때엔 원하는 것을 내어주고 억울함에 울기도 했습니다만, 제가 아는 언니는 묵묵히 버텼습니다. 그 잠잠함이 저에겐 무음의 비명처럼 들렸습니다. 짐승 같은 것들 속에서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으려는 언니의 고요한 악다구니가 제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아, 언니.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매일 저녁 얼마나 이를 악물었을까요. 저는 그 무렵의 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달군 듯 뜨거워집니다.


언니, 그래서 언니는 제게 선생(善生)을 사는 선생(先生)님입니다. 세상에 앞서 태어나 선한 신념을 잃지 않고 생을 지속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살아보니 인생은 선하기보다 악하기가, 이해보다 몰이해가 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하게 살아도 괜찮더라고. 어리석다 해도 스스로가 비참하지는 않더라고. 넘어질 때는 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말보다 행동보다 삶으로 답하는 언니를 그래서 저는 고집스레 '선생님'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해진 선생님, 해진 언니.

앞으로도 많은 일을 선생님과 상의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것만큼 당신을 언니로 모시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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