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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한의사 Sep 03. 2019

꿈을 싸는 아이

2018년 11월 18일

 일요일 아침. 여섯 시에 깼다. 아빠는 일곱 시에 일어났다. 여섯 시에 잠에서 깬 건 엄마가 말을 해 줘서 알았다. 아빠가 깨서 거실에 나가보니 엄마는 거실에 뻗어 있고 너는 혼자 앉아서 엄마가 잘라놓은 고구마 말랭이를 먹고 있다. 이제는 혼자 앉아서 손으로 말랭이를 하나씩 주워 먹을 줄도 안다. 백수로 두 달 지내는 동안에는 기어 다닐 줄만 알았지 도무지 일어선다거나 걸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더니 아빠가 일을 시작하고 최근 2주 만에 혼자서 일어나고 걷고 폭풍성장을 했다.


 6일간 너를 맞상대하느라 고생한 엄마는 전자레인지에 돌린 떡이 되어 거실에서 안방에 옮겨졌다. 엄마는 안방으로 옮겨지면서 '강이 똥 쌌어...'라는 말을 남겼다. 첫 번째 임무는 엉덩이를 씻기는 일이다. 벗기고 씻기고 닦고 다시 입혔다. 그리곤 같이 책도 읽고 놀았다. 한참 잘 노는 것 같더니 다시 엄마를 찾는다. 엄마가 자는 곳 옆에 누워서 둘이서 동시에 엄마를 괴롭혔다. 엄마는 괴롭혀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일어나지는 않고 이상한 말을 한다. "똥을 꿨는데 꿈이 샜어."


 얼핏 들으면 몹시 슬픈 이야기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협박을 받았다거나 아주 극한의 상황이었겠지) 똥이 필요해서 사람들에게 똥을 빌려다 썼는데 그 일 때문에 그동안 소중히 지켜온 자기의 희망이나 꿈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엄마가 그렇게 까지 힘든 상황이었다면 아무리 둔한 아빠라도 조금은 눈치를 채지 않았겠니. 그러니까 저 말은 사실 '꿈을 꿨는데 똥이 샜다.'는 말이겠지. 꿈속에서 네가 똥을 엄청 싸서 기저귀 밖으로 똥이 샜다는 말이다. 똥이 새서 옷이고 이불이고 온 천지에 묻으면 그냥 끝짱이다. 그대로 휴거가 왔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다. 다행히 꿈에서 그랬다고 하니 안심을 시키고 엄마를 다시 재웠다. 


 그런데 꿈이 샜다는 표현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너무 많아서, 꿈을 너무 많이 싸서, 기저귀가 넘칠 정도로 꿈을 싸서 그 꿈이 샐 정도라니 말이다. 꿈이라는 게 뭐 딱히 없어도 잘못된 거라거나 불편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꿈이 있다면 여러 가지 재미나는 게 많으면 좋을 것 같다.


 너는 똥을 싸고 나니까 또 배가 고픈 것 같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마주 보고 앉아서 밥을 먹였다. 잘 먹는다.

밥 먹고 또 똥을 쌌는데 엄마 꿈대로 결국 똥이 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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