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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한의사 Sep 30. 2019

머리카락

2019년 4월 6일

요즘 일어나는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한 달 전쯤엔 아침 일곱 시에서 일곱 시 삼십 분 사이에 깼는데, 최근에는 이르면 여섯 시에도 일어난다. 어린이집을 다니고 나서부터 기상시간이 바뀐 것 같다. 잠드는 시간도 더 빨라졌다. 아, 그건 아빠가 재울 때만 그렇다. 엄마가 널 재울 때는 엄마랑 더 있고 싶어서 그런지 누워서 한참을 괴롭히다가 잠들 때도 있다. 대개는 그럴 때 엄마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어제는 엄마가 너를 재우기 위해서 방에 들어갔는데, 한 시간쯤 있다가 방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네가 소리를 지르며 두두두 달려 나왔다. 뒤따라 나온 엄마가 하얗게 질려서 "엄마는 이제 안 잘 거야. 강이 너 혼자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한다. 너는 "아니 아니" 하면서 다시 엄마 손을 붙잡고 자러 들어간다. 그때도 아빠한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것은 잊지 않는다. 그렇게 또 한참이 지나 네가 잠들고 난 뒤 방문을 열고 엄마가 겨우 빠져나왔다. 엄마의 행색을 보니 오른쪽 귀 위쪽에 모근을 둔 머리카락들은 그 끝이 덩어리째 왼쪽 귀 방향으로 넘어가 있고, 목은 급성 사경이 와서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데다가, 분명 불을 끄고 재웠을 텐데 왜 안경을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왼쪽 안경다리의 경첩이 거꾸로 꺾인 채로 코에 걸치고 나왔으니, 네 방에서의 사투가 짐작이 갔다. 흡사 영화 <레버넌트>에서 그리즐리와의 사투를 벌이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상되었다.

오늘 아침에도 네가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아빠도 일찍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좀 빨리 마쳤다. 거울을 보면서 넥타이를 매고 머리 손질을 하는데, 어디선가 네가 갑자기 빗을 들고 달려와서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슥슥 빗는다. 머리카락이 아빠를 닮아서 숱이 별로 없고 곱슬에다가 가늘고 착 가라앉는다. (엄마는 머리카락이 아주 굵고 힘이 뽝 들어가 있어서 가마 쪽에 있는 머리카락들은 언제나 안테나같이 빳빳하게 서 있다. 가끔 잠꼬대로 이상한 말을 하는데 그걸로 외계 신호를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 머리카락은 뭘 어떻게 해도 도저히 멋이 안 산다. 물론, 얼굴이 제일 문제고, 또 아빠가 머리 손질을 못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35년 평생 미용실을 다니며 헤어스타일에 한 번도 만족해 본 적이 없다. 미용실 실장님이 왁스를 바르는 법을 알려줬는데도 매번 실패를 하니, 이제는 그냥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른 다음 아무렇게나 왁스를 묻혀서 화가 난 듯이 쥐어뜯고 출근을 한다. 아니 실제로 쥐어뜯다 보면 화가 난다. 아빠가 살아오면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잘 안 풀렸던 일들은 다 이 머리카락이 원인이 아닐까 싶다. 길을 가다가 유독 아빠에게만 자꾸 관상가, 도인들이 꼬이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다 이 머리카락 때문이다.

아침에 네가 빗질을 하는 것을 흐뭇해하면서 보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들이 떠올라 도저히 해결책이 없는 이 머리카락들을 물려주게 되어 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너는 아빠의 이 고백으로 인생의 큰 걸림돌 하나를 아주 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고,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있는 데다가, 기술은 앞으로 계속 발전할 테니 (얼마 전 5G도 상용화가 되지 않았나) 일단 마음을 편히 가지고, 밤에 잠을 재울 때 반항하지 말고 째깍째깍 잘 자도록 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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