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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주 Jan 08. 2022

금지된 언어, 통속어 2

통속성의 발견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     


겨울이었지만 붕어빵을 파는 노점 앞은 한산했다. ‘요즘 장사는 잘 되세요?’ 붕어빵이 구워지는 동안 노점 주인에게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잘 될 리가 있겠어요?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장사가 안 돼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에요.’ 


아, 붕어빵이 안 팔리는 게 노무현 때문이었구나.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이의 정책에 비판적이었지만, 노점 주인의 말에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돌았던 것 같다. 주인의 말을 듣고 나는 노무현이라는 이가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 아니 미워해도 되는 사람이 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가? 그가 말을 거칠게 하는 ‘막가는 대통령’이어서?  


 ‘말이 거친’, ‘막가는’ 대통령의 이미지. 이 이미지는 2003년 3월에 있었던 검사와의 대화에서 기원한다. 그는 검사들의 공격적인 질문에 ‘이쯤 되면 막 하자는 거지요?’라는 말을 던진다. 그리고 이 발언 중 ‘막 하자’는 언론들에 의해 ‘막가자’라는 어휘로 교체·재가공되었다. 


그 이후 언론은 노무현 대통령의 말하기 양식이 가진 공격성과 통속성을 과장하고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언론에서는 ‘말실수’라는 표현으로 집요하게 대통령의 말하기 양식을 공격했다. 


무엇이 ‘말실수’였을까? 언론에서 지적하는 ‘말실수’란 대부분 대통령의 통속어 사용을 가리킨다. 다음 칼럼은 그 ‘통속어’ 발견의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노 대통령은 저잣거리에서 통용될 법한 속어를 공식적인 자리에서 스스럼없이 내뱉는 걸로도 호가 나 있다. ‘개판’, ‘쪽수’, ‘백수’, ‘깡통’, ‘새우처럼 팍 오그려서’... 무수하다. 그런 생생한 표현들이 소시민들에게는 사실 귀에 팍팍 꽂혀서 그리 싫지 않은 측면도 없지 않다.

- 세계일보 2003년 6월 4일, <세계타워-대통령의 말>     


통속어는 기층의 언어이다. 일상의 언어로 실제로 많이 쓰이지만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그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숨겨진 언어인 통속어가 다른 사람의 입도 아닌 바로 대통령의 입을 통해서 발견된 것이다. 


‘개판’이니 ‘쪽수’니 하는 말들을 동네 아저씨가 골목길에서 내뱉었다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대통령의 입에서 발화될 때는 그 말 하나하나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렇게 통속어가 새삼스럽게 ‘발견’되는 이유는 그 발화자가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즉 대통령은 그 자체로 헌법 기관, 다시 말해 국가 제도이며 따라서 대통령이 발화하는 순간은 한 개인의 발화가 이루어지는 장면이 아니라 대통령이 가진 권력이 실현되는 공공의 장이 된다. 이 때문에 대통령이 사용하는 언어는 언제나 정제되어 있어야 한다.     

 

분위기 좀 바꿔볼까코드 바꾸기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의 말’에 대한 이런 금기를 깨버렸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왜 노무현 대통령은 금기를 깼을까? 무슨 이익이 있다고? 그냥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을까? 


여기서 다시 통속어의 속성을 짚어보자. 통속어는 소통가능성과 효율성을 최우선에 두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통속성이다. 다시 통속성이 무엇인지 짚어보자. 대중들은 소통에 도움이 된다면 그 언어가 어디에서 왔든 어떤 형식이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용한다. 이런 성질 때문에 통속어는 자신의 의도와 감정을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유리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통속어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런 소통 방식을 전략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이는 다음 칼럼 속에서 인용된 그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실수가 최근 부쩍 줄었다...노 대통령은 지난해 말부터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말투가 대통령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국에는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낀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일만 잘하면 되지 않습니까’라면서 ‘말실수 안 한 지 6개월 정도 되지 않나요’라고 되묻기도 했다. 말실수하면 서민들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서민들도 별로래요.’라면서 ‘앞으로 말실수 안 할 겁니다.’라고 다짐했다. ‘보통 국민들에게 친구 같은 허물없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도 했다.

- 국민일보, 2004년 2월 8일, < [Mr. president] 말실수 줄이려 노력하는 노 대통령>     


‘말실수하면 서민들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서민들도 별로래요’라는 발언은 노 대통령의 발화가 ‘실수’가 아닌 의도된 전략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는 통속어가 가진 일상어로서의 성격과 통속성을 직관적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노 대통령은 통속어를 자신이 원하는 의사소통 효과를 거두기 위한 코드 전환(code-switching) 전략에 사용했다. 여기서 코드 전환이란 언어 사용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특정 언어(코드)를 다른 언어(코드)로 바꾸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코드 전환의 효과 중 하나는 의사소통 상황을 재규정함으로써 대화의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다. 표준어로 강의하던 교사가 갑자기 사투리를 써서 수업의 분위기를 바꾸고, 특정 메시지를 부각시키는 방식도 이러한 코드 스위칭에 해당된다.(그리고 이런 경우에 우리는 교사가 ‘말실수’를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었던 <검사와의 대화>에서의 ‘이쯤 되면 막 하자는 거지요’라는 발언도 코드 전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이는 해당 발화가 공격적이거나 억압적인 어조가 아니라, 농담조로 이루어진다는 점, 발언의 순간 대화참여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즉 노무현 대통령은 통속어를 사용한 코드 전환을 통해 공격을 당하면서 가라앉은 무거운 분위기를 해소하고 동시에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다.      


말실수를 밥 먹듯이 하는 자의 잘못된 통치     


노무현 대통령은 이처럼 표준어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통속어라는 코드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노리는 의사소통적 효과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비표준 변이형을 이용한 이러한 의사소통 전략은 ‘말실수’라는 프레임으로만 재단된다.(교실에서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 사투리를 사용한 교사의 발화는 실수로 여겨지지 않는 점을 다시 상기해 보자.) 


여기서 눈여겨 살펴볼 점이 있다. 언론이 지적하는 말실수란 말의 내용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말하기 방식의 문제라는 점이다. 위에 제시한 <[Mr. president] 말실수 줄이려 노력하는 노 대통령>에서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말투가 대통령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정확히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용을 다 떠나서 너는 말본새 자체가 잘못됐어.’ 


‘말실수’ 프레임은 ‘말의 방식’의 문제를 ‘말의 내용’의 문제로 바꿔버린다. 우리는 누군가 말실수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실수가 말하는 방식의 문제였는지, 내용의 문제였는지는 구분하지 않는다. 말하기 방식이 이상하면 메시지 자체에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적절한 말하기 방식에 대한 언론의 대응은, 대통령의 ‘말실수’를 그저 언어의 문제로서만 한정시키지 않고 부적절한 통치의 문제로 전환하여 재규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말하기 양식(‘침묵’)과 노무현 대통령의 말하기 양식(‘다변’)을 대조하고 있는, <세계타워-대통령의 말>이라는 칼럼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박정희 대통령은 말수가 적었다...아마 역대 한국 대통령 가운데 가장 말을 아꼈던 인물이 아닌가 싶다...박대통령은 정국이 꼬이고 시름이 깊어갈 때 팔짱을 낀 채 집무실 창밖을 응시할 때가 더러 있었다....얼마간 무언의 대화가 있고 나서, 보고자는 조용히 방을 빠져 나간다.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처리한다...상대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다변가이다...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공개되는 말만 받아적는 데도 헉헉거린다...누구의 표현법과 통치술이 딱히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노 대통령도 박 대통령의 ‘침묵의 미학’을 원용해 본다면 어떨까. 토론과 말이 능사는 아니기 때문이다...대통령의 의중을 눈빛으로상황론으로 읽어낸다면 그는 1급 참모다박 대통령 곁에는 그런 참모들이 많았다...참모가 대통령의 지시를 듣고 이행한다면 2급이요질타를 받아야 움직인다면 추후 개각 때 소리 없이 바꿔야 한다.

- 세계일보 2003년 6월 4일, <세계타워-대통령의 말>    


      

이 칼럼은 박정희 대통령의 ‘침묵’과 노무현 대통령의 ‘다변’을 ‘효율’ 대 ‘비효율’의 문제로 슬쩍 바꿔치기 한다. 이 글에서 박 대통령은 참모들이 자신의 침묵에서 의중을 알아내고 ‘알아서’ 처리하게 만드는 통치자로 묘사되는데 이에 반해 노 대통령은 ‘공개되는 말만 받아 적는 데도 헉헉거리게’ 만드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런 방식으로 이 글에서는 ‘대통령의 말하기 양식 = 통치 행위’라는 도식을 구축한 후, 노무현 대통령을 부적절한 통치 행위를 하는 지도자로 자리매김 시킨다.   


   

오염물은 반드시 제거할 것    

 

그렇다면 통속어의 사용은 왜 ‘말실수’로 비난받고 더 나아가 부적절한 통치 행위로 파악되는가? 그 이유는 ‘국어’라는 체제 내에서 통속어는 일종의 불순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국어 체제는 강력한 체계이다. 이 체계는 순수하고 균일한 언어로 구성되어 있고, 국가의 모든 국민은 동일한 언어를 말할 것이라는 기대와 요구에 기반해 있다.  


뭐 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가스야 게스케는 근대 이전의 어느 국가도 모든 주민이 동일한 언어를 말할 것을 요구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국어’를 사회적 공간 하나하나가 규율을 가르치는 교육 장치로 만들어 사회구성원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게 만드는 일종의 ‘헤게모니 장치’로 보자고 제안한다. 


이런 헤게모니 장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치안’과 ‘규격화’가 필요하다. 모든 국민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규격화’를 전제로 한다. ‘모두’ 국어를 사용하는 모두가 같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는 이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치안’이 확립되어야 한다. 


이러한 국어 체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언어 표준’ 또는 ‘표준어’가 아닌 변이형들 – 대개는 소수 언어와 지역 방언-이 배제되어야 한다. 변이형들의 배제는 순수하고 균일한 상태의 국어를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이연숙에 따르면 이 과정을 통해서 ‘국어라는 표상이 일단 확립되면 현실의 언어 변이는 이차적인 것이며, 상상되는 ‘국어’의 동일성이야말로 본질적인 것이라는 언어 의식’(이연숙, 국어라는 사상)이 생긴다. 국어 교육을 비롯한 학교 교육 제도나 언론은 이러한 언어 의식을 끊임없이 주입시키는 국어라는 헤게모니 장치의 일부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통속어를 사용한다? 이는 국어 체제에 도전하여 균열을 내는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국어’라는 표상의 공고화에 기여하는 언론의 입장에서는 이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렇게 국어라는 헤게모니 장치의 일부인 언론은 계속해서 ‘오염물’을 제거하려 한다.       




2002년 김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후보의 ‘정치적 사부’ 역할을 할 때의 이야기다. 노 후보가 실언(失言)을 자주 하면서 인기가 날로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는 노 후보가 기자들을 만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후보 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내가 갈 때까지 지둘러”라고 말하고 현장에 도착해 노 후보의 발언 내용을 사전 감수(監修)했다. ‘지둘러는 기다려의 호남 사투리로 김 의원의 닉네임이기도 하다...노 대통령은 서민적인 표현이 대통령의 권위를 낮추고 국민을 즐겁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아이들이 배울까 봐 걱정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회와 청와대에 있는 386들은 비속한 말을 쓰지 않으면 세상의 불의(不義)에 침묵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분위기다무릎을 치게 하는 절묘한 표현은 없고칼끝으로 생채기를 찌르고 후빈다. 인터넷 정치기사마다 젊은 누리꾼들이 편을 갈라 험한 댓글을 주고받는다. 청소년들에게 독극물이나 불량식품처럼 유해한 언어가 뉴미디어를 타고 확산되고 있다. 막말정치편 가르기 정치가 바로 누리꾼 언어의 오염원()이다.

- 동아닷컴 2006년 9월 26일 <황호택 칼럼 - 속옷 벗은 言語>
 



이 글에서는 내용 전개상 필요가 없음에도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사부인 ‘김의원’의 별명이자 호남 사투리인 ‘지둘러’라는 어휘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또한 노무현 대통령을 위시한 정치 세력이 국어에서 배제해야 할 언어-지역 방언과 저급한 언어-를 사용하는 그룹임을 드러낸다. 


이 칼럼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정치 세력들의 언어는 ‘아이들이 배울까 봐 걱정’될 만큼 비교육적이고, ‘비속하며’, ‘공격적’이다. 더 나아가 이 정치 세력의 말은 ‘언어의 오염원’으로 지목된다. ‘독극물’, ‘불량식품’, ‘오염원’과 같은 표현들은 이들 정치 세력의 언어가 ‘비합법적’(독극물, 불량식품)이며, ‘더럽고 불순’(오염원)하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순수하고 균질해야 하는 국어 체제 내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것임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오염물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언어 시민권이 없는 자는 출입하지 마시오     


  노무현 대통령의 통속어 사용에 대한 언론의 담론 구성 중 눈에 띄는 또 다른 점은, 노무현 대통령의 말하기 양식과 그의 계급적 정체성을 연결함으로써 그를 통치자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언론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평소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수준 낮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만 나온 사람이 맞구나하는 편견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대면하고 이야기 들어보니 친절하고 소탈했다. 언론을 통해 볼 때보다 친근하고 인간적이었다. 고모부 같은 편안한 인상이었다. 국민에게 가식 없이 다가서려 하는 것은 좋은 것 같다. 그러나 대통령에게는 솔직함만이 필요한 게 아니다.

- 오마이뉴스 2007년 2월 28일, < “노무현 로또 당첨될까?”... 임기 4년째, 바닥과 대박 사이-오마이뉴스> 시민기자 10인의 대통령 회견 뒷담화 >      



노무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SNS 상의 글이나, 기사에서는 그의 말하기 양식과 그의 고등학교 졸업 학력을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던 이 언론사에도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유사한 입장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노무현 대통령이 사용한 통속어는 그가 가진 사회적 정보를 말해주는 간접적인 표지로, 이 표지는 노무현이란 인물이 통치자가 가져야 할 문화적 자본, 또는 언어 자본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한국어의 여러 변이형 중 표준어는 행정, 정치, 법, 교육 제도와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표준어는 정치 문화적 권력을 가진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사회적 제도에서 통용되는 표준어의 화법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언어 자본-부르디외가 말한 의미에서 ‘상징자본’-이라고 한다면, 노무현 대통령의 통속어 사용은 그가 그러한 언어 자본을 갖추지 못한 인물임을 보여주는 표지가 되는 셈이다. 즉 노무현 대통령은 언어 시장에 출입할 자격인 ‘언어 시민권’이 없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노무현 대통령의 통속어 사용은 그가 자격이 없는 통치자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정리해보자. 노무현 대통령의 입을 통해서 한국 사회는 어쩌면 처음으로 자신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인 통속어를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뭐랄까? 거울로만 보던 자신의 얼굴을 사진으로 확인했을 때의 충격과도 같을까? 우리는 거울 속에서 이상적인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를테면 거울을 볼 때 우리의 뇌는 눈으로 들어온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셀프 포토샵을 하는 것 같다. 그러다 우리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는 순간, 우리는 우리 얼굴 위에 내려앉은 주름과 잡티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국가 기관의 입은 우리가 사용하는 진짜 언어의 모습을 현상해 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통속어가 가진 통속성을 간파하고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의도와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전략을 취했지만, 그의 의사소통 전략은 그의 정적들이 만들어낸 말실수 프레임에 갇혀 버렸다. 그리고 ‘말실수 프레임’ 전략은 국어 체제라는 헤게모니 장치와 결합하면서 매우 효과적으로 노 대통령을 괴롭혔다. 이처럼 노무현 대통령의 사례는 국어라는 헤게모니 장치가 공적인 공간 속에 나타난 통속어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그리하여 통속어 사용이 어떻게 정치적 문제로 전환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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