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별의 장면들
[장면 1]
비행기 안은 언제나 지루하다. 어수선한 자리 정리가 끝나고 사람들은 출발을 알리는 마지막 ‘의식’을 기다리고 있다. 그 의식이란 안전 수칙 안내 방송이다. 승무원 몇 명이 노란색 구명조끼를 입고 복도에 선다. 나는 눈을 감고 아무 생각 없이 안내 방송을 듣는다. 구명조끼는 탈출 직전에 부풀려 주십시오. 이윽고 같은 내용이 영어로 방송된다.
“저~ 발음하는 거 봐라.”
“그러게. 어째 쟤들 발음은 몇십 년이 지나도 나아지질 않냐?”
나는 눈을 뜬다. 내 앞자리에 앉아 있는 중년 남성 둘이 승무원의 영어 발음을 비꼬며 낄낄거리고 있다. ‘그럼 당신들은?’이라고 물어보고 싶지만 참는다. 하지만 그 질문을 실제로 입 밖으로 내뱉었어도 그 남성들은 평가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비웃는 당사자들의 발음도 분명 ‘후질’ 테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발음을 할 수는 없지만, 원어민의 진짜 발음을 듣고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할 테니까.
[장면 2]
요새 영어 회화에 관심이 생긴 딸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빠, 얘 뉴진스 멤버인데 영어 발음 완전 좋아. 한국에서만 영어 배웠다는데.”
딸아이는 자신보다 ‘발음이 좋은’ 뉴진스 멤버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검색해 보니 뉴진스 멤버의 동영상 말고도 한국 아이돌의 영어 발음이 네이티브 스피커처럼 좋다고 칭찬하는 동영상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한국 아이돌의 ‘뛰어난’ 영어 발음에 대한 칭찬과 쌍으로 돌아다니는 유튜브 동영상이 있다. 일본 아이돌의 영어 발음을 조롱하는 영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동영상에서는 일본인들이 영어 발음 때문에 어떤 망신을 당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런데 그런 동영상들은 ‘좋은’, ‘뛰어난’, ‘네이티브 스피커같은’ 발음이란 누구의 것을 가리키는지, 왜 그런 발음을 좋다고 여기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장면 3]
원어민의 발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자니, 오래전 군복무를 마치고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원어민 화자와 전화로 영어 인터뷰를 했던 일이 떠오른다. 인터뷰를 마친 후, 원어민 화자는 마지막 충고랍시고 대충 이런 말을 했다.
“근데, 네 영어 발음과 억양은 흑인 같아. 좀 고치는 게 좋겠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군생활에서 만났던 동료들을 떠올렸다. 나는 카투사병으로 미군에 배속되어 군복무를 했는데 당시 같이 생활했던 소대원 중 상당수는 흑인들이었다. 출신도 다양하고, 그만큼 영어를 발음하는 방식도 천차만별이어서 서로의 발음과 말하기 방식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일을 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서 익힌 내 ‘흑인 발음’ 때문이었는지, 나는 일자리를 구하는 데 실패했다.
2. 원어민이라는 말이 숨기고 있는 것
뭔가 불편하기는 하다. 하지만 이것을 차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을 넘어 다음과 같이 발끈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영어 발음을 흉보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런데 이걸 차별이라고 하다니. 그럼 세상에 차별 아닌 게 뭐가 있겠는가?’
위의 사례들이 왜 차별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어민 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살펴봐야 한다. 원어민 중심주의란 특정 언어의 소유권이 그 언어를 모어로 하는 원어민에게만 있으며, 따라서 특정 언어를 평가할 수 있는 권위가 원어민 화자에게만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서점의 영어 회회 코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네이티브는 이렇게 말한다’, ‘네이티브에게 그 표현은 이렇게 들린다’, ‘네이티브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류의 책제목들은 이런 관점을 반영한다. 콩글리쉬? 네이티브는 이걸 진짜 영어로 승인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콩글리쉬는 부끄러운 짝퉁. 가짜야.
이왕 영어 얘기가 나왔으니 영어에서 원어민, 즉 네이티브는 누구인지 따져보자. 다시 말해 영어의 주인은 누구인가? 아마 당신은 미국인이나 영국인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답은 틀렸다. 미국인이나 영국인, 또는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국가들의 인구들보다도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링구어 프랑카(Lingua Franca), 즉 공통어로서의 영어를 사용한다. 영어가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언어가 되어, 비원어민들 사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이렇게 저렇게 사용된 지는 이미 오래다. 영국인이나 미국인들이 영어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며 무조건 자신들처럼 말하라고 하기에는 뭔가 뻘쭘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도 원어민 화자가 사용하는 ‘진짜 영어’라는 개념을 포기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진짜 영어’를 사용하는 원어민의 모습을 최대한 자세히 구체적으로 떠올려보자. 그의 키, 체격, 피부색, 옷차림, 사는 곳, 직업, 연봉, 만나는 사람들까지. 당신의 상상 속에서 영어를 말하는 사람은 어떤 모습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가? 점쟁이는 아니지만 당신의 머릿속으로 떠올린 영어의 주인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다. 당신이 그린 영어의 주인은 금발의 건장한 체격의 백인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도 깔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의 남성. 그 남성은 저음으로 영어를 말할 것이다. 그 남성은 밝고 깨끗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전문직 종사자이며, 중산층이 모여 사는 깨끗한 동네에 단란한 가족들과 함께 살 것이다.
당신이 영어의 주인을 공장이나 건설 현장의 노동자로 상상했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다시 말해 ‘원어민’이 사용하는 ‘진짜 영어’는 경제적 문화적 자본을 가진 이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다. 비원어민이 이 원어민 영어의 수준에 도달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물적 자원이 투입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그런 노력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이 영어의 주인을 흑인이나, 아시아계로 떠올렸을 가능성은? 0%. 위의 장면 3을 다시 복기해 보자. 나와 전화로 인터뷰를 진행했던 (분명 백인이었을) 원어민 남성 화자에게 ‘흑인 영어’는 소위 ‘네이티브 영어’에 포함되지 않는다. 흑인 영어의 발음과 억양을 고치라는 지적 속에는 흑인 영어가 ‘결함이 있는 불완전한 영어’, 적어도 백인이 사용하는 영어보다 수준이 낮은 저급한 언어라는 인식이 숨겨져 있다.
더 나아가 흑인 영어식 발음과 억양을 고치라는 충고는, 흑인 영어 사용을 일종의 질병이나 결손의 증거처럼 바라본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흑인 영어는 불완전한 언어도 저급한 언어도 아닌 그 자체로 온전한 언어이다. 흑인의 검은 피부를 질병의 상태로 여기고 백인의 피부처럼 하얗게 만드는 게 말이 안 된다면, 흑인의 영어를 고치라는 것도 말이 안되는 차별이다.
3. 이중 차별: 백인이 될 수 없지만 그래도 백인이 되고 싶어.
이처럼 ‘원어민’이라는 개념은 계급적이고 인종주의적이다. ‘원어민’으로 표상되는 백인 남성은 인종과 계급 위계의 최상층에 위치한다. 백인 남성의 언어도 당연히 위계의 최상을 차지해야 한다. ‘네이티브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언술은 위계를 만들어내어, 백인 중산층 계급의 언어를 상위에, 비백인이나 노동 계급의 언어를 하위에 위치시킨다. 이런 위계는 다양한 매체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대표적인 게 광고다. 한국인이라면 한국인이 주 소비자인 상품 광고에 백인 모델이 등장하고, 브랜드의 이름을 백인 남성이 목소리를 깔고 발음하는 광고를 누구나 한두 개쯤 떠올릴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장면 1과 2는 한국인들이 이런 위계를 철저히 내면화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위계 설정을 통해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기꺼이 열등한 위치에 배치시킨 후 다시 그 열등한 위치에서 우열의 위계를 나눈다. 장면 1에서 중년 남성들은 여객기 승무원들의 영어 발음을 비웃는 것을 통해 승무원들을 자신보다 더 아래에 위치시킨다. 그리고는 자신들은 백인보다 열등하지만, 승무원들보다 더 백인에 가깝다고 느낀다. 장면 2에서 일본인 아이돌의 영어 발음을 비웃는 한국인 유튜버는 최고인 인종인 백인 밑에 한국인을, 그리고 그 밑에 한국인보다 열등한 인종인 일본인이라는 위계를 설정하고 이를 자랑스러워한다. 이런 위계 설정을 통해 한국인들은 좀 더 백인에 가까운 유사 백인이 되어, 일본인들보다 우월한 인종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장면 1과 2는 한국인들이 스스로를 타자화시켜 자신과 타인을 이중으로 차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4. 완벽하게 하얀, 한국어 학습자: 인종주의의 한국적 재현
한국어는 누구의 것인가? K-pop을 위시해서 온갖 K가 세계로 퍼져 나가는 지금 한국어를 한국인들만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처럼 보인다. 이를 증명하듯이 대중매체에서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다른 언어를 모어로 하는 외국인들이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유창하게 토론을 하고 농담을 한다. 이처럼 한국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 한국어가 말 그대로 링구아 프랑카로 쓰이는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 TV만 틀면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들이 등장해서, 이제는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세련된 외모를 가진 백인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다. 사실 전체 한국어 학습자의 수로 따지자면 중국인 학습자나 일본인 학습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따라서 고급 한국어 학습자의 비율도 더 높을 수밖에 없으며, 대중매체에서도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이 더 많이 등장해야 한다. 그런데도 매체에 노출되는 학습자들은 대부분 백인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점은, 실제 한국어교육 현장에서는 대중매체에 등장한 외국인들처럼 한국어에 능통한 학습자를 만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점이다. 사실 외국인 학습자들이 한국어를 ‘원어민’만큼 구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예외적인 일이다.(때문에 원어민성을 외국어 학습 성공의 유일한 지표로 삼는다면, 거의 대부분의 외국어 학습자는 실패자로 규정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중매체에서 반복해서 재현되는 한국어 학습자는 ‘원어민’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는(때로는 원어민을 능가하는), 세련되고, 명민하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재현의 과정에서 ‘한국어 원어민성’은 ‘백인성’과 교묘하게 등치된다. 등치의 과정은 이렇다. 백인은 뛰어나며 별다른 수식이 필요없는 ‘인간’ 그 자체이다.(백인은 ‘우리 여성들은’, ‘우리 노동자들은’, ‘우리 흑인들은’이라고 외치는 것처럼 ‘우리 백인들은’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 백인은 그 자체로 인간이니까.)
그 뛰어난 백인이 한국어를 학습해서 한국어 원어민 수준의 한국어를 사용한다. 뛰어난 백인이 얻고자 하는 것은 한국어 원어민 수준의 한국어 실력이며, 이는 한국어 원어민이 백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이 한국어 원어민 중심주의가 ‘백인성’으로 번역되는 과정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한국어 원어민성은 백인의 육체를 얻게 된다. 반대로 원어민 수준의 한국어를 통해서 백인은 ‘우리’로 인정받게 된다.
원어민 수준의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백인. 이런 백인 한국어 학습자의 정반대편 끝에는 이주노동자와 결혼 이주 여성들이 있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이들이 많을 텐데 이상하게도 대부분 이들의 한국어는 어눌하고, 어딘가 모르게 주눅이 들어 있는 것처럼 재현된다. 이들이 구사하는 한국어는 열등함과 미숙함의 표지이자 그들이 ‘우리’가 될 수 없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된다.
‘우리’의 말이 아닌 ‘열등’한 존재들의 말이기 때문에 이는 웃음의 소재가 될 수 있다. 2000년대 초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사장님 나빠요’라는 대사를 유행시킨, 스리랑카 이주노동자 캐릭터인 ‘블랑카’의 개그가 그렇다. 이런 전통은 계속 이어져 중국 연변 지역 조선어를 사기 범죄와 연관시키는 개그가 최근까지 유행이었다. 이를테면 원어민의 한국어가 아닌, 어설픈 한국어는 가난한 자들과 범죄자들의 표식이다. 이들은 ‘우리’가 될 수 없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연변 방언을 사용하는 조선족보다 서울대를 나와 한국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미국인 타일러를 더 ‘우리’에 가깝다고 느낄 것이다.
원어민에 가까운 한국어를 말하는 우월한 백인종과 망가진 한국어를 구사하는 열등한 인종들. 인종주의의 한국적 재현은 이렇게 완성된다.
5. 다나카상의 발음은 정말 웃긴가?: 인종주의를 살아있는 목소리와 몸으로 보여주기
다나카상이 자기 소개를 한다. 저는 꼬츠, 꼬츠, 미나무입니다.(저는 꽃미남입니다.) 그 말을 듣고 패널들은 키킥거리며 웃는다. 요즘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다나카 상’이 나오는 유튜브 방송의 풍경이다. 한국인 개그맨의 ‘부캐’로 설정된 ‘다나카’는 도쿄의 유흥가 가부키초에서 일하는 일본인 호스트이다. 다나카는 한국어를 배울 때 일본인 화자들이 어려워하는 발음과 억양을 개그의 소재로 끌고 온다. ‘꽃’을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꼬츠’로 발음하며 웃음을 유도하는 식이다. 나는 이 장면이 전혀 웃기지 않다. 이런 식의 개그는 인종주의를 몸으로 체화시켜 보여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원어민 수준의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한국어 학습자는 우스운 발음, 우스운 말, 우스운 복장과 외모를 가진 열등한 인간으로 재현된다. 한국인들이 이런 개그에 웃고 반응하며 인종주의를 내재화한다.
숙련된 한국어 교사들은 외국인 학생이 발화하는 한국어를 듣고, 그 학생의 모어가 무엇인지 알아맞힐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학생이 어떤 발음을 특히 더 어려워하고, 나중에 어떤 문법을 사용할 때 오류를 만들어 낼 것인지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첫 번째 언어, 모어는 우리의 몸에 강력한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한국어의 음운 체계에서 /r/과 /l/ 발음은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귀는 두 소리를 구분하지 못하고, 우리의 혀는 이 소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모어가 몸에 남긴 시간의 흔적은 부끄러워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각 언어의 모어 화자들은 각기 다른 흔적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한국어를 학습하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 때도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은 전혀 ‘웃기는’ 게 아니다. 새로운 언어를 학습하는 것은 새로운 습관을 몸에 새기는 작업이며, 이전에 새겨진 몸의 기억과 새로운 몸의 기억이 충돌하고 협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한국어가 탄생한다.
오래전 내게 한국어를 배웠던 학생들이 복도에서 왁자지껄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보고 놀랐던 일이 생각난다. 한글을 읽는 법부터 시작해서 한국어를 배운 지 겨우 3개월밖에 되지 않는 학생들이 즐겁게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한국어는 ‘원어민’의 한국어가 아닌, 뭔가 얼기설기 대충 끼워 맞춘 그런 한국어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완벽하게 서로 소통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다른 친구의 발음이나 어색한 표현을 한국인 원어민의 그것과 다르다고 비웃지 않았다. 학생들은 겨우 한 줌 자기 손에 쥐어진 빈약한 한국어 재료를 가지고도 풍성한 대화의 식탁을 차려내고 있었다. 그들의 언어는 한국어로서는 불완전하지만 세계어이자 공통어로서는 완벽했다. 학생들의 대화는 소통의 의지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일본인 한국어 학습자의 발음을 희화하는 다나카 개그에서 이러한 소통의 의지는 없다. 대신 위에서 내려다보며 일본인 한국어 학습자들의 발음을 평가하고, 그런 발음을 하는 이를 열등한 인종으로 구분하고자 하는 원어민의 권력 의지는 있다. 다나카 상은 진짜 일본인 학습자들을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 개그맨의 부캐인 다나카 상은 일본인을 원어민 한국인보다 못한 존재, 그래서 웃음거리로 만들어도 되는 미숙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재현한다. 다나카라는 캐릭터 자체도 일본 사회의 주변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다나카는 일본의 여성 손님들에게 술을 팔고 접대하는 호스트바의 호스트로 일하며, 그마저도 여성 손님들에게 지명받지 못하는 호스트이다.
다나카상에 모두 열광하지 않느냐고? 심지어 그의 노래에도 열광하고? 다나카상이 발표한 노래에 열광하는 이유도 그가 변변치 않은 주변인으로 설정된 것에 있다. 그의 노래가 인기를 얻는 이유는 노래를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은 주변부의 인물이 뛰어난 노래 실력을 보여주는 의외성 때문이다. 노래 경연 프로그램에서 가난한데 노래를 잘하고, 못생겼는데 노래를 잘해서 인기를 얻은 사례를 우리는 익히 많이 알고 있지 않은가?
그냥 웃자고 하는 개그인데, 죽자고 덤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표준 언어, 원어민의 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특히 발음은 다른 집단을 식별하고 공격하는 대표적인 도구였다. 구약성경을 보면 ‘쉽볼렛’이란 단어를 발음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고 발음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내용이 나온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불과 100년 전 1923년의 관동대지진 당시 많은 조선인들은 ‘15엔 50전’이라는 뜻이 ‘주고엔 고짓센’이란 발음을 제대로 못해 학살당했다. 조선인들을 학살한 일본인들은 처음에는 조선인들의 발음을 웃기다고 생각하고 이를 따라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파국 앞에서 증오할 대상이 필요할 때, 그 웃음의 대상을 죽임의 대상으로 바꾸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모든 재현은 정치적이다. 다나카 상 캐릭터가 재현하는 어느 일본인 한국어 학습자의 재현은 한국의 인종주의를 목소리와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내가 다나카 상의 개그와 그 개그에 반응하면서 웃는 사람들에게 미소지을 수 없는 이유다. 때로 혐오와 차별은 웃으면서 찾아오기도 한다.
6. 원어민은 없다
원어민은 없다. 생각해보자. 외국인 학습자가 학습해야 하는 한국어 원어민의 언어에 지역 방언은 포함되는가? 공장 노동자의 언어는 원어민의 언어가 될 자격이 있는가? 시장통 상인들의 언어는 어떠한가? 노인들의 언어는? 이렇게 곰곰 따지다 보면 대부분의 한국어 모어 화자들조차 ‘표준적인 한국어를 구사하는 한국어 원어민’의 자격을 따기에는 애초에 글러 먹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원어민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허상이다.
실체도 불분명한 원어민이 되라는 주문, 원어민처럼 되어야 한다는 강박, 이것들은 우리를 구속하고 차별하게 만든다. 소통은 원어민처럼 완벽해져야만 가능한 게 아니다. 소통할 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허상에 불과한 원어민 수준의 언어가 아니라,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