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9.31)
부동산 뉴스에 답답해하다 11년 전인 2009년 8월 31일에 쓴 글을 다시 꺼내 본다.
11년이 지났지만 아파트 제국의 폭주는 계속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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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발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고등학교 시절, 우리 반 아이들의 애창곡은 윤수일의 '아파트'였다. 고등학교 2년 동안 같은 반을 지도했던 담임선생의 애창곡이 바로 '아파트'였던 까닭이었다. 부르다 보면 가사처럼 왠지 쓸쓸해지기도 하고, 왠지 흥겨워지기도 하는 노래. 이 노래를 우리는 체육대회 날 반 별 대항 축구경기에서 이겼을 때, 소풍 끝 무렵 술 한 잔 들어가 불콰해진 담임의 기분을 띄워주기 위해, 기타 자질구레한 각종 학교 행사에서,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댔다. 단독주택에 사는 담임이 왜 '그렇게 '아파트'를 좋아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아파트 근처에 별빛의 흐르는 다리나 바람 부는 갈대밭이 있을 턱이 없건만, 나에게 이 노래는 내 머릿속 아파트에 '별빛이 흐르는 다리와 바람 부는 갈대밭'이라는 수식어를 자연스럽게 붙여주었다. 제주에 아파트라는 주거형태가 나름 희귀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내가 알고 있던 아파트는 우리 동네에 있는 '인제 아파트'와 신제주의 '제원 아파트'가 다였다. 두 아파트 또한 그닥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노래의 힘인지 반복의 힘인지 '별빛의 흐르는 다리'와 '바람 부는 갈대밭'은 여전히 내 무의식 속에 딱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 무의식 속에 붙어 있던 아파트에 대한 낭만을 떼어내버린 것은 대입 시험을 치르기 위해 찾은 서울의 광경이었다.
"아, 답답해." 김포 공항에서 버스를 탄 지 10분 쯤 지났을 때 외마디 비명처럼 이 말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그 답답함의 원인이 잔뜩 껴입은 내복과 겨울 코트 때문인 줄 알았다. 코트를 주섬주섬 벗어 놓으려고 할 때 문득 지갑 간수 잘 하라는 어머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나는 소매치기의 천국이자 아름다운 그 도시, ‘서울, 서울,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 내게 서울은 소매치기가 한여름철 모기만큼이나 번성하는 곳이었기에 버스만 타면 누군가가 '기사 양반 경찰서로 갑시다'라고 고함을 지를 것 같았다. 나는 지갑이 잘 있는지 확인한 후 고개를 들어 창밖을 쳐다보았다. 창밖 풍경 속으로 어깨에 잔뜩 힘을 준 미식축구 선수들처럼 아파트의 촘촘한 대오가 휙휙 지나갔다. 밋밋한 표정의 아파트 대열은 지루하게 계속 이어졌다. 거리를 지나면 아파트가 나오고, 또 다음 거리에서도 아파트가 나왔다. 점점 지갑 방어의 의무는 희미해지고 졸음이 밀려왔다. 기어이 나는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지갑을 잃어버리는 꿈에 퍼뜩 놀라 잠에서 깼다. 놀란 눈으로 다시 창밖을 쳐다보았을 때, 여전히 아파트는 버스를 따라오고 있었다. 거울 속의 거울처럼 끝없이 무한 반복되는 풍경이었다. 그제야 나는 답답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끝없는 아파트들의 도시 서울에 만약 킹콩이 나타난다면 아파트 사이를 점프해서 서울의 북단에서 남단까지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킹콩은 궁금해 하리라. 어떻게 해서 이 거대한 회색 나무들이 이곳에 번성하게 되었는지. 또한 킹콩은 금세 서울이 자신에게 최고의 서식지가 되리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개미굴에 나뭇가지를 넣어 개미를 쏙 빼먹는 야생 침팬지처럼 킹콩 또한 아파트 여기 저기 손가락을 집어넣기만 하면 풍부한 먹잇감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아파트 사이를 자유롭게 뛰어 다니는 킹콩에게 사냥당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 때 나는 아파트라는 거대한 개미굴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가난한 시골 개미였으니까.
그 시골 개미는 자기 지갑이 안녕한지 확인하다가 문득, 별빛이 흐르는 다리와 바람 부는 갈대밭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2. 제국의 입구
킹콩의 서식지 같은 아파트. 이런 아파트의 이미지를 나는 지금도 계속 가지고 있지만, 몇 가지 예외 또한 있다. 그 예외적인 아파트를 구경하려면 나의 20대 초반으로 돌아가야 한다.
제주시 법원 옆에 위치한 이도 아파트. 그 아파트 어느 한 동 5층에는 제주시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친구 J가 홀로(가끔 동생이 오기는 했으나)살고 있었다. 허름한 아파트 문 앞에는 영화 '도어즈(Doors)'의 포스터가 붙어 있고, 집 여기저기에 시집과 각종 음반, 비디오가 널려 있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친구 J를 스승삼아 영화와 음악과 책을 온 몸으로 배웠다. 예를 들어, 올리버 스톤의 '도어즈'를 보면서 대낮부터 짐 모리슨이 부르는 The end를 틀어 놓고, 술에 취해 인디언 춤을 추다가 지쳐 쓰러지면 하늘을 보면서 담배를 피워대는 식이다. 그 아파트에서는 아무도 우리를 저지하지 않았다. 모든 종류의 난리법석과 망나니짓이 허용되는 J의 아파트를 나는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 같다. 얼마 전 J로부터 그 아파트가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 한 쪽이 쓸쓸해지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J의 아파트는 내가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잠시 머무를 수 있었던 내 자아의 인큐베이터였다. 그 인큐베이터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는 지금보다 좀 더 찌질했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J의 아파트는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고,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서울 시민으로서 삶을 시작한 이후의 '킹콩의 서식지'라는 아파트의 이미지는 '제국'의 이미지로 확장, 업그레이드되었다. '제국?'. 거창하다 못해, 그야말로 '오바'스러운 말이지만, 내게 '아파트'를 설명할 수 있는 여러 단어 중 '제국'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왜? 내게는 제국의 속성과 아파트의 속성이 일란성 쌍둥이처럼 꼭 닮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든 제국의 속성이 그런 것처럼 제국은 언제나 팽창하는 것을 제 숙명으로 안다. 그 결과, 주변의 모든 것을 다 집어 삼킨다. 그 팽창은 자신이 블랙홀이 되어 엄청난 중력으로 스스로 꺼져 내릴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제국이 잔인한 힘만으로 세력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이민족에 대한 부드러운 회유와 포용 정책 또한 제국의 속성이다. 그리하여 아이러니하지만 이 제국에 한번 정복되고 나면, 그 제국의 신민이 된 자들은 자신이 그 제국의 일부인 것을 한없이 자랑스러워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국'이라는 말은 이 땅의 아파트를 설명하기에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 말이다.
어쩌면 먼 훗날, 20세기 중후반과 21세기 한국의 일상사를 연구하는 문화사가들은 현대 한국인을 아파트 거주민과 비아파트 거주민으로 나누어 고찰할지도 모른다. 미래의 역사가들은 아파트 거주 주민들을 집주인과 전세, 월세 주거자로 나누고, 다시 이를 지역과 평수에 따라 세밀하게 분류한 다음, 그들의 사고와 생활 행태를 면밀히 따져 보리라. 중세를 이야기하면서 마치 성 안의 주민과 성 밖에서 살았던 주민들의 생활상을 비교하는 것처럼 말이다.
각설하고, 내가 아파트를 '제국'으로 파악하게 만든 사건은 신촌과 이대 사이에 걸쳐 있는 한 동네에서 일어났다. 다들 알겠지만 신촌에는 아파트 대신 화려한 모텔과 술집이 번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이 술집들과 모텔들만 있을 것 같은 신촌의 뒤편에는 얼기설기 작은 골목길과 슬레이트 지붕이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 컴컴한 동네가 있다. 무슨 도령, 어쩌구 선녀 하는 무당집 간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동네. 그 동네의 작은 쌀집 맞은편, 깊은 계단 밑 작은 지하방이 내 거처였다. 길고양이들이 자기 집 마당인냥 어슬렁거리고, 가끔 골목길 틈새에서 등교시간의 고등학생들이 모여 앉아 담배를 피워대는 그런 동네.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부에 있으나 아직은 아파트 제국의 발톱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내가 살던 곳이었다.
생각해보면 길고양이들과 나는 공동운명체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길고양이에게도 거처를 허락하는 곳이기에 나에게도 좁은 방이나마 허락되었던 것이다. 비록 펌프가 고장 나면 하수가 역류하여 방으로 밀려들어오고, 스티로폼 한 장으로 나누어진 벽 너머 사는 백수 아저씨의 술 취한 욕설이 그대로 들려오는 곳이었으나, 내게 그 지하 방 한 칸은 커다란 축복이었다.
그렇게 일 년 넘게 지하방에서 어둠과 곰팡이에 잠겨 살다가, 빛이 드는 방을 찾아 동네에 있는 이층집(인지 일층집인지 구분이 안가는)으로 옮겼을 때, 동네에는 재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느 날 소문으로만 들리던 재개발 조합 설립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붙었다. 동네 곳곳에 이영애와 장진영의 포스터가 붙기 시작했다. 이영애를 모델로 쓰던 건설사와 장진영을 모델로 쓰던 건설사 사이에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다. 동네 작은 쌀집은 건설사의 임시사무소가 되었다. 어느 날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파이팅을 외치며 그 쌀집, 아니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들은 집주인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손에 한 가득 여러 선물 꾸러미를 든 채로. 처음 골목에서 마주쳤을 때는 그들은 세입자인 내게도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정성껏 인사를 건냈다. 물론 그 미소는 집주인이 누구인지 파악이 되자 감쪽같이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회사의 지지자들은 서로를 비방하는 대자보를 담벼락에 붙였다. 길고양이들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대자보 아래를 거닐었다. 그렇게 이영애와 장진영이 벌이는 싸움이 한참 치열하게 전개되던 어느 날 아침 출근길, 시내버스 사이로 느닷없이 관광버스들이 나타났다. 관광버스가 멈추자 그 앞으로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치어리더들이 도열했다. 얼마 후 응원도구 팜팜을 손에 든 치어리더들 앞에 나름 한껏 차려입은 집주인들이 나타났다. 치어리더들이 팜팜을 흔들며 환호성의 터널을 만들었고, 멋쩍은 듯 상기된 표정의 집주인들은 그 터널을 지나 관광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 치어리더들은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저녁이 되었다. 무료한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 있던 치어리더들은 다시 두 줄로 도열해 웃음을 선사할 준비를 했다. 관광버스가 멈추어 서고 치어리더들은 팜팜을 흔들며 터널을 만들었다. 아침과 달리 집주인들은 당연한 대접을 받는 듯 그 터널을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좋은 구경했다고 하하 호호거리며 나오는 집주인들의 모습과 치어리더들. 그리고 그 밖에서 치어리더들을 관리하는 회사 직원들의 모습. 지나가면서 이 모든 것을 구경하는 행인들. 몹시도 어색한 연극 같았지만, 모두들 자신들이 맡은 역할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아니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흥분했다고나 해야 할까.
그 연극을 보면서 나는 영화 속에서 봤던 로마제국의 개선행진이 떠올랐다. 고대 로마든, 아프리카 오지의 부락이든, 현대 한국의 신촌이든 인간이 하는 행동은 언제나 반복되기 마련이다. 치어리더들이 팜팜을 흔들어대면서 만들어낸 터널은 일종의 개선문이었다. 내가 난민촌이라고 불렀던 그 동네의 집주인들은 영광스럽게도 아파트 제국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치어리더들이 만든 개선문을 통과하면서 그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을 것이다.
전쟁은 이영애의 승리로 끝났다. 재개발 조합에서 무슨 감투를 쓰게 된 욕쟁이 옆집 아저씨는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동네를 순시하러 다녔다. 추석과 설날에는 조합장 이름으로 고향에 잘 다녀오시라는 현수막이 붙었다. 조합장은 집 주인들을 좀 더 '고급스러운' 아파트 제국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입성시킨 지도자였기에, 명절 때마다 내거는 현수막을 통해 그 사실을 노골적으로 알리고 싶어 했다. 물론, 잘 다녀오시라는 말은 제국의 신민이 될 자격이 없는 나 같은 세입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3. 카스트 또는 매트릭스, 그것도 아니면, 은하철도 999
시간이 흘러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운 좋게도 아파트 제국의 신민이 되었다. 비록 온전한 신민이 아니라 전세로 아파트에 살고 있는 3등 신민으로(적은 평수의 오래된 아파트, 거기에다 전세로 살고 있으니 4등, 5등 신민일 수도 있겠으나 복잡한 셈은 못하겠다. 이렇든 저렇든 3등 이하라 치자.)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오래된 아파트에서 딸을 얻었다.
처음 이 곳으로 이사 온 지도 삼 년이 지났다. 그 사이 수풀이 우겨져 있던 동네 황무지에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일렬 횡대, 종대로 무표정하게 서 있는 내가 사는 아파트와는 달리, 새로운 아파트는 화려한 외양에 주민들을 위한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아파트 제국은 진화하고 있고, 그에 따라 제국 사회의 계급도 계속 분화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새로 들어선 아파트 때문에 계급 강등을 당하고 있다고 느꼈던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주민회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여기저기 마구 금이 가기 시작한 아파트에 페인트를 다시 칠하고 외벽에다 큼지막하게 '성원 샹떼빌'이라는 이름을 써 넣은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공고문은 언제나 '사랑하는 성원 샹떼빌 가족 여러분'이라는 인사말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여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주민들은 '유명 브랜드 아파트의 가족'이 되었다. 높은 계급장을 달지 못하자 부끄러운 계급장을 살짝 가려주는 애교를 발휘했다고 할까.
애교. 나는 애교라고 했다. 그러나 '성원 샹떼빌 가족 여러분'이라는 문구 뒤에는 절박함이 숨어 있다. 아파트 제국에서 계급은 냉혹한 현실이며, 그 현실 속에서는 처참하게 계급장을 까보여야 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내를 한 유명 대학 병원에 입원시키면서 나는 그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 입원을 시키시려면 보호자분이 자기 집을 가지고 있거나, 집을 가진 다른 분의 보증이 필요합니다." 입원 수속을 담당한 병원 직원의 말이었다. 처음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랐다. 그 다음에는 분노했다. 그러나, 나는 직원에게 한마디 항의도 하지 않았다.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병원 홈페이지에 항의하는 글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으나 금방 접었다. 대신 나는 입원 신청서를 조용히 받아들고 응급실에 누워 있는 아내에게 그 말을 전했다. 아내는 내게 장모님의 이름과 처갓집의 주소를 불러주었다. 주소를 받아쓰면서 나는 나와 아내의 모습에 놀라워했다. 우리 부부는 이제 아파트 제국의 계급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면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매일 전셋값과 집값이 폭등한다는 뉴스를 듣는다. 그 뉴스는 우리 부부가 아파트 제국 내에서 계급 상승을 꾀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아파트에서 나고 자라나 아파트가 일종의 매트릭스처럼 여겨질 내 딸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딸아이에게 아파트는 '딸'의 존재를 규정하는 카스트가 될 가능성이 크다. 괴롭지만, '네가 사는 곳이 네가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이 아파트 제국의 카스트 제도에서 우리 가족이 자유로워질 가능성은 무척 희미해 보인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문득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처럼 말하고 싶어진다. '이제 아파트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인간이 아파트를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아파트라는 밈(memes)이 진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숙주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아파트는 자신의 진화를 위해 인간을 지배하고 희생시킨다.'
가끔 지나가면서 부동산 사무실 창가에 붙어있는 아파트 값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나는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까지 거리를 가늠해보는 것처럼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과연 우리는 안드로메다에 갈 수 있을가? 이 매트릭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미친 폭주 기관차에서 뛰어내릴 수 있을까? 오늘도 뉴스를 들으며, 아내와 나는 표를 잃어버린 은하철도 999의 메텔과 철이처럼 한없이 근심어린 눈빛을 나눈다. 그러니까,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너의 아파트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