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승주 Aug 06. 2020

나의 자매들에게

(2016.8.19)


0. 


말(言語)들은 언제나 미끄러진다고 한다. 말하는 대상에 닿으려 할수록 말들은 그 대상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특히 세상을 떠나버린 이를 붙잡기 위해 끌어 모은 말들은 더욱 그렇다. 그의 부고를 전하는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 나는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부음을 전하는 문장 속 주어 자리에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이 너무나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울먹이는 아내의 전화를 받았을 때, 갑자기 울컥거리는 목울대를 잠재우려 동승한 이들에게 쓸데없이 더운 날씨 타령만 해댔다. 지진을 처음 경험하는 이들도 이와 같으리라. 이상한 덜컹거림에 처음에는 ‘뭐지?’ 하고 낯설어 하다가 결국 집안 서가의 책들이 와장창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는 그런 느낌.


마음 속 집안의 가구들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면서 그를 위해 말들을 끌어 모으리라 생각했다. 그 말들이 결국 그와 그를 아는 이들, 그리고 그를 모르는 이들에게 가 닿을 수 없을지라도. 비록 부질없는 애도의 방식일지라도.


1.


직장을 옮긴지 2년, 어쩌다 보니 나는 전 직장을 ‘친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당연히 전 직장의 동료들을 ‘친정 식구’가 되었다. 그리고 어쩌다 친정 식구들과 연락을 하게 될 때면 선배 ‘언니 선생님’의 안부를 묻게 되었다. 


내가 전 직장을 ‘친정’으로 부르는 이유는 내가 그곳에서 친정 식구들이 10년 동안 나를 다른 사람으로 키워냈기 때문일 것이다. 운 좋게 그런 친정의 일원이 되기 전까지 나는 어디로 이어지는 선분 하나 없는, 그냥 세상을 떠돌아다는 조그마한 점이었다. 


2. 


그러니까 그는 친정과 나라는 희미한 점 사이에 자를 갔다대고 줄을 그어준 사람이었다. 그밖에는 또 무엇이 있나? 직장 생활 초기에 그가 다른 학교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일이 있으면 그는 나를 ‘우리 학교 남자 선생님’이라고 소개했다. 남자가 한 명도 없는 직장이었기 때문에 그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남자 선생님들이 몇 명 들어오고, 내가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아내와 결혼했을 때 나는 그에게 ‘우리 학교 선생님과 결혼한 남자 선생님’이 되었다. 여전히 나는 그에게 ‘남자’ 선생님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0년 동안 근무하면서 나는 그와 제대로 깊은 얘기를 나눌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그는 자신을 낮추는 온화한 상사였고 나는 능력은 없지만 기세등등하고 까칠한 ‘남자’ 부하 직원이었다. 10년을 같이 지냈지만 뭔가 서먹한 사이.


 그래도 그 까칠한 부하가 복도나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으면 그는 등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로 ‘선생님’하고 불렀다. 그리고 부하가 놀라 뒤를 돌아보면 씩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지나갔다. 그는 그런 상사였다. 못난 부하를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상사. 


이를테면 그는 남자들의 언어가 아닌 자매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3. 


대학 신입생 시절이었다. 나는 대학 신입생답게 푸른 잔디밭에 앉아 푸르른 젊음의 낭만을 찾았지만 그런 낭만 같은 것은 없었다. 대신 남자 동기들과 바로 윗학번 선배들, 그리고 군대를 제대한 남자 선배들과의 ‘남학생 모임’이 있었다. 잔디밭에 둥글게 둘러 앉아 한 가득 채워진 소주잔을 마신 후 머리 위로 컵을 털어내는 의식이 진행됐다. 그리고 군대를 제대한 한 선배의 말이 엄숙하게 울려 퍼졌다.


“사회는 군대다. 학교도 군대고.”


그것은 명령과 복종이라는 두 가지 코드(간혹 거기에 의리라는 가짜 인공 조미료를 뿌려대는)를 가진 남자들의 언어였다. 힘이 있으면 밟고, 힘이 없으면 엎드려라, 강한 척하고 약점은 보이지마라, 등등의 용법을 가진 남자들의 언어. 글쎄다. 잘 모르겠다. 과연 이것을 남자들의 언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여하튼 불쌍한 한국 남자들은 제대로 된 자신들의 언어를 가질 기회를 갖지 못했고, 그래서 후지고 후진 군대의 언어를 자신들의 언어로 입양했다고 치자. 


어릴 적부터 그 언어에 적응하지 못했고 적응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나는 남자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보기를 돌같이 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남자 후배들에게는 선배 취급도, 남자 선배들에게는 후배 취급도 받지 못하는 자발적 불가촉천민이 되었다.


4. 


남자든 여자든 성별에 관계없이 나는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어디를 가든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편이었다. 어쩌다 입을 열면 냉소가 가득한 분노의 말들만 쏟아냈다. 나는 한마디로 사회회가 되지 않는 ‘독고다이’형 인간이었다. 영어 회화 시간에 강사에게 ‘I’m not a social being.“을 읊어대던. 


직장에 들어가기 전 한국어교사 생활을 했던 선배에게 들었던 철칙이 있었다. 학생들과의 문제가 생기면 절대 동료들에게 얘기하지 말 것. 그러면 너의 능력을 의심하고 뒤에서 그리고 앞에서 너를 비웃을 것이니. 그 선배가 전해준 한국어교사의 세계는 전형적으로 남자의 언어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등을 보이지 마라. 그러면 누군가 너의 등을 찌를 것이다. 


그런데 첫 직장은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서식지였다. 남자의 언어가 아닌 자매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그렇다. 나는 그 언어를 자매들의 언어라고 부르고 싶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한국어교사가 얼마나 고된 직업인지. 일주일에 20시간 이상 같은 학생들을 상대하고, 엄청난 수업 준비로 하루를 보내다보면 입에서 단내가 나는 직업이라는 것을. 운이 좋으면 좋은 학생들을 만나지만 보통은 수시로 문제가 있는 학생들 때문에 마음을 다쳐야 하는 직업이라는 것을. 분필 하나로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 막노동에 가까운 직업이라는 것을. 게다가 이 일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고 그 결과를 함께 공유하는 다른 일들과 달랐다. 교사는 홀로 학생들을 상대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어교사는 몸은 함께 있지만 정신은 완벽하게 고립되기 좋은, 그런 직업이었다.


첫 직장의 사람들이 남자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었다면 나 또한 홀로 고립되었을 것이다. 첫 학기 내 수업에서 한 학생은 수시로 울면서 뛰쳐나갔고, 다른 학생은 작심했다는 듯이 내게 ‘선생이 학생 비위 맞춰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따졌다. 또 다른 학생은 수업 중 나눠주었던 유인물을 들고 ‘선생님 이 지문은 여기에, 그림은 이쪽에 넣으셔야죠’라고 훈계를 했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기 시작했다. 수업 시작 전에 손을 덜덜 떨며 담배를 물었고, 수업 끝난 후에도 손을 덜덜 떨며 담배를 물었다. 급기야 한 쪽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 내가 선택한 이 길이 과연 맞는 길인가 하루하루 고민하던 시기였다.


 탈도 많고 문제도 많이 일으켰던 첫 학기, 선배들은 내게 네 탓이 아니라며 나를 다독여줬다. 왜 내 탓이 아니겠는가. 자의식 과잉에다가 할 줄 아는 것 없는 바보 같은 남자 신입 교사였지만 그들은 나를 비웃거나 평가하지 않았고, 그저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그 덕에 나는 지옥 같았던 첫 학기를 겨우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5.


내가 직장에 들어가서 배정 받은 자리는 706호 사무실의 한가운데였다. 아침마다 동료들은 내 옆에 놓여 있는 서류장 위에 자신들이 가져온 온갖 음식을 풀어 놓고 왁자지껄 수다를 떨었다. 그 수다 속에서는 고립은 생기지 않았다. 대신 음식과 수업에 대한 이야기가 자유롭게 돌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선생님들은 수업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토론했다. 입사 동기가 아니라 같은 급을 가르치는 선후배 선생님들끼리 더 막역한 사이가 되던 시절이었다. 새로운 수업 방식들이 마법처럼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 보였다. 명령과 복종이라는 남자들의 언어로는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아, 이런 조직도, 이런 공동체도 가능하구나라는 경탄하며 어딘가에 글을 끄적였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수다 속에서 함께 떠들다가 어느덧 나는 선배들에게서 ‘완전 아줌마 같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아줌마 같다는 말이 가장 듣기 싫은 소리였겠지만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좋았다. 내게는 그 말이 ‘너도 이제 사람이 됐구나’라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한국  남자들은 군대를 다녀오면 사람이 됐다 또는 어른이 됐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남자들의 언어를 익히면 어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 706호에서 자매들의 언어를 익히고 다른 의미의 사람, 다른 의미의 어른이 됐다. 


아줌마 같다는 말이 기분 좋았던 또 다른 이유는 남자인 내가 그들의 ‘자매’로 인정받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느낌.


6. 


자매들의 언어가 사용되던 시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내 직장을 지배하는 더 큰 조직은 자매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남자들의 언어를 사용하라는 강요가 시작되었다.(아니 이미 그런 강요는 있었다.) 남자의 언어는 ‘합리’와 ‘효율’과 ‘경쟁력’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었다. 남자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는 자매들의 언어로 이루었던 많은 일들은 ‘주먹구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수업과 관련된 일들은 짤게 쪼개어졌다. 쪼개어진 일들에 대한 계획과 보고와 평가가 뒤따랐다. 백 년 전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찍어내듯 생산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그 공정이었다. 사람들은 대체 가능한 부품이 되었다. 자매들의 언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당연히 마법도 더 이상 작동되지 않았다.


706호의 아침은 조용해졌다.


7.


 나는 지금의 친정을 있게 한 많은 것들은 자매들의 언어를 사용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가 이루어 놓은 여러 가지 업적으로 기억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그를 자매들의 언어를 가능하게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는 군림할 수 있었지만 군림하지 않고 섬기려 했다. 명령할 수 있었지만 명령하지 않고 설득했다. 혼자 갈 수 있었지만 혼자 가지 않고 언제나 같이 가려했다. 못난 사람도 내치지 않고 감싸 안으려 했다. 이런 태도야 말로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태도가 없었다면 자매들의 언어 또한 없었을 것이다. 자매들의 언어를 배우지 않았으면 지금의 나 또한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남자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강요 아래에서, 자매의 언어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의 압력 아래에서 그가 얼마나 힘겨워했을지 나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가 왜 나를 ‘남자’ 선생님이라고 소개했는지 이해가 될 것 같다. 서글픈 일이지만 그는 나를 남자들의 언어만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7. 


급하게 찾아간 그의 장례식장에는 많은 동료들이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나의 손을 잡아주는 그들의 손길과 포옹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직장 상사를 잃은 사람들이 아닌 자매를 잃은 사람들의 비애였다.


그들은, 나의 자매들이었다. 


8.


김성희 선생님, 말들은 미끄러진다고 합니다. 제가 위에 길게 써 놓은 저 부질없는 말들도 결국 미끄러질 터이지요. 하지만 나의 자매들이 선생님의 마지막을 지키면서 기원했던 말들은 미끄러지지 않고 선생님께 닿았으면 합니다. 선생님께 많이 배우고 선생님 덕분에 많이 자랐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무 걱정 없이 평안하시길. 선생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언어 진화의 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