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nd and scent> 캐럴과 치즈볼
캐럴과 한 여름밤의 꿈
창원시 상남동은 우리 학교에서 기본요금으로 갈 수 있었던 번화가이자, 한때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력을 소모한다는 소문이 난 곳이기도, 저층부터 고층까지 카페-술집-노래방-모텔 순으로 입점한 구조의 건물이 하도 많아 일명 '한 건물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불명예스러운 소문이 따른 동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섣불리 불명예라 말하기에는 상남에 소재한 거의 모든 건물이 이러한 구조였기에... 어쩌면 꽤 많은 상인이 원했던 꼬리표였는지도 모르겠다.
상남동 옆에는 중앙동이 있고 중앙동에는 스물한 살의 내가 삼 개월간 캐셔로 근무했던 웨스턴바가 있다. 중앙동은 주변 동네들에 비해 어딘가 퀴퀴하고 오래된 느낌이 났다. 관광호텔, 비즈니스호텔이 심심찮게 보이고 외국인들을 위한 오래된 식당과 펍이 모여있었던 동네. 한 선배의 부탁으로 그중 한 곳에서 아르바이트하게 되었고 나는 이를 영어를 쓸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유치원과 몇몇 학원 시절 만난 원어민 강사분을 제외하면 내가 파란 눈의 외국인과 대화할 기회 자체는 없었으니까. 실제로 캐셔로 근무했던 그해 치른 토익에서 나는 꽤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사실 그 성적은 같은 해에 영어학원 파트 강사로 근무하며 만들어졌을 확률이 높다. 그리하여 세상 무서운 것 하나 없던 투애니원 보란이는 이 웨스턴 바에서 영어가 아니라 '쉽게 버는 돈의 달콤함'과 '맛 간 남자의 무서움'을 배운다.
면접을 보러 간 날이 아직 생생하다. 바가지 머리에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5분 지각까지 하며 들어서는 나를 보며 사장님은 어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나이를 들었을 때 사장님은 잠깐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때 사장님 머릿속에 정확히 무슨 생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는 대답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장님은 내가 이곳에서 삼 개월 이상은 근무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안심했던 것 같다. 행색이며 행동이며 너무 미성숙해 보이지만, 상황상 급한 대로 들였다가 내보내면 되겠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당시 나는 출근하라는 확답을 듣기도 전에 혹시 캐셔가 칵테일을 직접 만들어 마셔봐도 되는지부터 물었던 학생이었으니까…
출근해 보니 그곳은 천국 같았다. 학원 파트 강사 외에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 없던 나에게 웨스턴 바는 할 일이 없어도 너무 없는 낙원이었다. 메뉴라곤 칵테일뿐이니 들고 날라야 할 안주도 없고, 음식이 없으니 치워야 할 것도 적고, 심지어 가장 겁났던 화장실은 건물 공용이라 관리인이 따로 있었다. 그곳에서 캐셔가 하는 일은 말 그대로 '돈 계산' 뿐이었다. 알다시피 한국의 아르바이트는 대부분 이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서빙 직원이 화장실 청소를 하고, 학원 강사가 애들 뒤치다꺼리에 학부모 응대까지 하는 일은 너무나도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동네 호프집에서 화장실 청소를 지시받은 후 청소는 안 하고 구역질만 한참 해대서 결국 사장님이 대신 청소를 해준 적이 있다. 사장님은 청소 내내 자신의 팔자를 한탄했고 나는 다음 날 잘렸다. 출근한 지 3일 만의 일이었다.
바 이름은 'Kevin's bar'였는데 '케빈'은 당시 사장님의 선배이자, 이 바를 처음 만든 사람의 이름이라고 했다. 나는 케빈이 창조한 공간에서 정말 많은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하나같이 신기한 음악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취향만큼이나 신기했던 건 다름 아닌 유튜브였다. 2010년도의 나에게 유튜브란 그저 정체 모를 희한한 웹사이트였다. 외국인 손님들이 스크린에 연결된 컴퓨터로 희한한 웹사이트를 온종일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들마저 희한해 보였다. 모름지기 노래는 한곡 한곡 다운로드하여 재생하는 것이 익숙했던 나에게 유튜브로 듣는 노래가 많이도 낯설어 보였던 모양이다. 왜 저들은 영상으로 노래를 틀까. 왜 저들은 영상으로 노래를 들으며 맥주를 먹을까. 옛날로 치면 음악다방 같은 느낌인 걸까. 별 얘기도 없이 노래만 들을 거면 집에서 먹는 게 낫지 않을까. 제대로 된 술맛도, 제대로 된 분위기도, 제대로 된 사랑도 모르는 나만의 생각이 그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바는 영국의 어둑어둑한 펍과 비슷한 분위기라 꼭 산장 같았다.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캐럴은 너무나도 크리스마스적이라 나는 캐럴 트는 손님들을 좋아했다. 가끔 스크린 앞에 사람이 없으면 나는 곧장 돈통 사수를 잊고 컴퓨터로 달려가 내가 좋아하는 캐럴을 검색해 틀었다. 다운로드하지 않고 틀 수 있는 유튜브가 여간 신기했던 보란이가 그때 있다면, 지금은 유튜브 뮤직으로 매일 노동요를 스트리밍하는 내가 있다. 맥주와 곁들일 안주라고는 치즈볼밖에 없어 사방에 진한 치즈 냄새가 가득했던 나무 산장. 그 속에서 외국 사람들과 함께 듣는 캐럴. 나는 아마도 거기서 낯선 행복을 맛본 것 같다. 그다음 해가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혼자 해외여행을 떠났지만, 어쩌면 생애 처음 느껴본 이국정취는 케빈스 바에서였을지도.
여기까지가 케빈의 산장에서 얻었던 행복이었다면, 앞으로 꺼낼 기억에는 다소 미간이 찌푸려질 만한 일들이 놓여있다. 지금 생각해도 입꼬리가 씁 하고 올라가는 일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수상하게도 그 모든 일이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된다. 어느 날부터 외국인 펍에 출근하듯 방문했던 50대로 추정되는 한국인. 예전엔 분명 얼굴과 이름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모든 게 흐릿해져 버린.. 어떤 아저씨가 한 명 있다. 이 아저씨를 떠올릴 때면 나는 권성연의 '한 여름밤의 꿈'이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1990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이 곡은 내가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알게 된 명곡이지만, 30대가 된 지금 이 노래를 떠올리면 권성연의 청아한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스물여섯이 아니라 케빈스 바에서 캐럴을 듣고 있던 스물한 살이 떠오른다. 다름 아닌 제목 때문이다.
- 학생이 내 한 여름밤의 꿈이 되어줄래?
컴컴한 건물 복도에서 아저씨가 나에게 건넨 말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나를 복도에서 한참 기다리고 있던 아저씨. 그가 나에게 건넨 건 '한 여름밤의 꿈'이라는 말뿐만이 아니었다. 내 손에는 수표 몇 장이 쥐어져 있었다. 내 손등을 양손으로 겹쳐 다독이며 자꾸만 자신의 '한 여름밤의 꿈'이 되어줄 수 없겠냐고 묻는 것이다. 스물한 살의 내가 되물었다.
- 한 여름밤의 꿈이요??!
몰라서 물은 말이 아니었다. 스물한 살은 뭣도 모를 나이인 동시에 아무것도 모를 나이는 아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친절하게 내 손을 부여잡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여름이 지나면 꿈처럼 사라질 일처럼, 눈 한번 꾹 감고 자기와 데이트해 줄 수 없냐는 거다. 저-기 근처 인터내셔널 호텔에 자기의 숙소가 있다고. 자기는 어차피 두 달이 지나면 가족이 있는 대구로 돌아가야 한다고. 쉰이 넘은 그는 쉰내 나는 욕망을 마치 로맨스인 양 미화해 가며 나를 열심히 설득하는 중이었다. 나는 고민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내 손에는 몇 장의 수표와 아저씨의 손이 겹쳐 있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 이 돈은 왜 주시는 거예요?
- 퇴근할 때 택시비하라고~
- 감사합니다! 혹시 조금 더 주실 수 있나요?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 예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저씨의 두 눈에 약간의 놀람과 미칠듯한 설렘이 일렁였다. 내 마음속에 치욕스러움이 차오를수록 어쩐지 반응은 더 엇나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지금 감정적으로 괴롭다는 사실을 아저씨에게 들키기 싫었던 것 같다.
'잠깐만.. 보자 보자..' 아저씨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홀린 듯이 지갑을 열어 있는 현금을 나에게 모두 주었다. 카드만 쓰고 다녀 지금은 현금이 많지는 않은데, 자기랑 데이트만 해주면 필요할 때마다 줄 수 있다는 설명도 절대 놓치지 않았다. 딸 뻘에게 잔뜩 흥분한 두 눈을 보며, 나는 남자의 무서움을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직관했던 것 같다. 아저씨가 지갑을 탈탈 털어 투자하듯 쥐어준 돈 삼십만 원을 들고 나는 그대로 퇴근했다. 분명 뭣도 모를 나이었지만, 아저씨 역시 나에 대해 뭣도 모르는 중이었다.
- 안녕히 가세요!
환하게 웃으며 택시 문을 닫는 나를 배웅하던 아저씨는 끝끝내 몰랐다. 그날이 내 마지막 근무일이었다는 것을.
이 노래는 '한여름 밤의 꿈'이 아니라 '한 여름밤의 꿈'이다. 무슨 뜻일까. 어떤 여름밤에 꾸게 된 꿈을 의미하는 걸까. 가끔 권성연의 노래를 들으면 이 노래를 알게 해 준 종민이의 근사한 창법과 이 아저씨의 음흉한 미소가 같이 떠오른다. 반갑지 않은 조합이다. 이 아저씨만 아니었다면 중앙동과 케빈스 바 역시 나에게 따뜻한 캐럴과 고소한 치즈향으로 기억되었을 텐데. 내 소중한 추억을 시꺼멓게 배려놓은 아저씨. 그러나 나도 몰랐던 내 발칙한 용기를 처음으로 확인하게 해 준 나의 아저씨. 나는 그 후로 건강한 경계와 짜릿한 촉을 가지고 남은 20대를 재미있게 보냈다. 우리 아저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저씨에게 이 세상은 너무 과분한데..
아직도 어딘가에서 어린 학생을 탐닉하고 있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그의 가족도 걱정이고. 돌아온 겨울, 올해는 꼭 그 아저씨가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철저히 혼자이길 바라며.. 새파란 옷과 말간 표정으로 대상을 따낸 권성연의 강변가요제 참가 영상을 튼다. 캐럴만큼 달콤한 그 목소리를 끼얹어 그 겨울의 기억을 희석해 본다.